모든 유니콘(기업 가치가 10억달러 이상이고 창업한 지 10년 이하인 비상장 스타트업)의 최종 목표는 기업공개(IPO)다. 뿔 달린 상상 속의 동물이 현실의 벌판에서 종횡무진 뛰어다니기 위한 첫 번째 관문이 상장이다. 유니콘 창업자와 초기 투자자는 상장을 통해 그들의 꿈과 노력이 헛되지 않았음을 자본 시장에서 입증할 수 있어야만 승자로 기록될 수 있다.
상장을 위해선 꼭 필요한 것이 있다. ‘스토리’다. 요즘은 흑자 성장에 대한 요구가 커지고 있긴 하지만, 그럼에도 무한(無限)의 투자 무대에 올라서기 위해선 자신만의 상장 스토리가 명확해야 한다. 쿠팡이 한국 기업 최초로 뉴욕증권거래소에 입성할 수 있던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였다. 월가의 투자자들은 ‘아시아의 아마존’이란 간명성에 꽂혔다.
이랬던 야놀자가 위기설에 휩싸이고 있다. 영업 구조는 적자의 늪에 빠졌고, 명예퇴직 등 구조조정까지 단행했다. 숙박 플랫폼 분야 경쟁사인 여기어때의 맹추격도 부담이다. 무엇보다 가장 큰 위기의 진원지는 상장을 위한 스토리의 고갈이다.
‘아시아의 오라클’이란 비전으로 2021년 소프트뱅크 비전펀드로부터 1조1901억원의 자금을 투자받은 야놀자의 이수진 창업자(총괄 대표)는 지난 6월 난데없이 “K패키지로 5000만 해외 관광객을 유치하겠다”며 글로벌 종합 여행 플랫폼을 부르짖었다.
야놀자는 두 개의 비전이 연결돼 있다고 주장한다. 오라클처럼 호텔운영과 관련된 소프트웨어를 한국을 비롯해 동남아시아, 인도 등 해외의 중소 호텔&리조트에 공급(야놀자클라우드가 담당)함으로써 국내외를 아우르는 숙박 네트워킹을 구축하고, 이를 토대로 아시아를 대표하는 종합 여행 플랫폼으로 우뚝 설 수 있다는 설명이다.
모든 것을 잘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뚜렷하게 잘하는 것이 별로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시아의 오라클’이란 초기 비전만 해도 뚜렷한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 올해 야놀자 반기보고서에 따르면 야놀자의 핵심 사업인 플랫폼 부문과 클라우드 부문의 매출 비중은 각각 52.7%, 18.38%다. 지난해 인수한 인터파크트리플 부문(32.82%)보다 비중이 작다.
야놀자의 클라우드 부문이 작년 상반기에 거둔 매출은 591억원이었다. 이와 관련, 야놀자클라우드를 이끌고 있는 김종윤 각자대표는 올 상반기에 보유 주식 중 33%를 처분해 300억~400억원의 차익을 실현했다. 야놀자 주식 0.13%를 처분한 것으로 알려졌다. ‘아시아의 오라클’이 되기엔 갈 길이 멀다는 얘기다.
상장을 향한 야놀자의 무게 중심은 여행 플랫폼 쪽으로 확연히 이동 중이다. 항공권 거래에 특화된 인터파크, AI(인공지능) 여행 스타트업인 트리플, 고급 숙박 예약 플랫폼인 데일리 등을 잇달아 인수한 데 이어 최근엔 모두투어, 노랑풍선 등 패키지 여행사를 사들이는 방안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여행에 생성형 AI 서비스를 접목하려는 목적으로 최근 이스라엘의 AI 스타트업을 3000억원에 인수했다는 설(說)도 나온다.
네이버는 국내 검색 시장의 압도적인 1위 사업자다. 여행은 네이버쇼핑 목록을 채우고 있는 핵심 콘텐츠 중 하나다. 여행업계 관계자는 “네이버가 소상공인에 특화된 SME 전용 여행 상품을 출시할 계획”이라며 “자체 생성형 AI 시스템까지 갖추고 있는 네이버는 AI를 활용해 여행 플랫폼으로서의 장악력을 더욱 키워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구글 등 빅테크로부터 한국의 검색 시장을 지켜냈듯이 초거대 AI 전쟁에서도 안방을 사수하겠다는 것이 네이버의 목표다. 이를 위해선 네이버라는 플랫폼 위에 여행 등 다양한 상품을 올려놓는 것이 필수다. 네이버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사용자가 원하는 서비스를 네이버 AI가 불러오는 ‘플러그인’ 서비스를 구축할 것으로 예상된다. 야놀자가 네이버와의 플랫폼 대결에서 승리할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
이수진 총괄대표의 ‘5000만 해외 관광객 유치’ 발언은 이런 배경을 파악해야만 온전히 이해할 수 있다. 네이버와 차별화를 꾀하려면 상품 중개만이 아니라 상품을 직접 개발해야 한다. 모두투어 인수설이 끊이지 않고 있는 이유다. 1000억원 미만의 투자로 전업 여행사를 인수함으로써 패키지여행 시장에 뛰어들겠다는 셈법이다.
하지만 여행 상품 ‘제조’ 시장에서의 경쟁 역시 야놀자에 불리한 상황이다. 1위 사업자인 하나투어의 장벽이 워낙 높아서다. 하나투어는 오미크론 변이가 한창이던 지난해 1월에 전 직원을 출근시키는 결정을 단행했다. 코로나 이후를 대비하기 위한 결정이었다.
하나투어는 ‘하나팩 2.0’이라는 프리미엄 패키지 상품을 만들고, 하나투어 앱을 개편하는 등 조직에 디지털 DNA를 입히는 데 주력했다. 올해 30주년을 맞은 하나투어는 올해 상반기 영업이익 97억원을 기록했다. 하반기 영업이익 규모는 상반기를 웃돌 것으로 예상된다. 송미선 하나투어 대표는 3년 안에 여행 시장 점유율 35%를 달성할 것으로 자신하고 있다.
모두투어 등이 하나투어를 따라잡기엔 격차가 상당히 벌어졌다는 것이 여행업계의 중론이다. 하나투어는 프리미엄 패키지 상품을 만들면서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었다. 현지 호텔, 가이드를 설득했고, 고객들의 불만을 반영하는 등 하나팩 2.0은 매일 진화 중이다. 야놀자가 모두투어나 노랑풍선을 인수한들 단숨에 하나투어를 따라잡기는 불가능하다.
영어 버전이 나오더라도 해외 관광객이 한국을 방문할 때 글로벌 OTA 말고 야놀자 앱에 가입할 이유가 과연 있을까. 이를 실현하려면 엄청난 해외 마케팅 비용을 감수해야 한다. 게다가 인바운드 시장엔 강력한 경쟁자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글로벌 K콘텐츠 관광 플랫폼을 표방하는 스타트업인 크리에이트립이 대표적이다. 2016년에 창업한 크리에이트립은 뷰티, 다이닝, 카페 등 다양한 업종의 600여 곳과 제휴를 맺고, 한국을 찾는 해외 관광객들의 관문 역할을 하고 있다.
김종윤 대표는 로마사(史) 애호가라고 한다. 수백억 원의 돈을 손에 쥔 전문 경영인과 중견 기업 오너들이 참여하는 기업인 모임의 일원인 것으로 알려졌다. ‘흙수저 창업자’로 불리는 이수진 총괄대표는 이미 엄청난 부를 일궜다. 창업자와 그의 동지들은 성공했을지 몰라도, 성장 스토리가 고갈된 야놀자는 설립 이래 최대의 위기를 맞고 있다.
박동휘 기자 donghuip@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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