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물가 안정을 위해 식품 가격 인상을 억제하자 기업이 가격은 유지한 채 제품 용량을 줄이는 사례가 늘고 있다. 정부의 인위적인 물가 억제가 이른바 ‘슈링크플레이션’을 부추긴다는 지적이 나온다. 정부는 제품 가격 인상뿐 아니라 슈링크플레이션도 자제하도록 업계에 당부하겠다고 밝혔다.
6일 식품업계에 따르면 CJ제일제당은 이달 초부터 냉동 간편식품 ‘숯불향 바베큐바’ 중량을 280g에서 230g으로 줄여 편의점에 공급하고 있다. 가격은 봉지당 5600원으로 같지만 g당 가격은 20원에서 24.3원으로 21% 올랐다.
동원F&B도 지난달부터 대표 제품인 ‘양반김’ 가격을 봉지당 700원으로 유지한 채 중량은 5g에서 4.5g으로 0.5g 줄여 소매점에 납품하고 있다. 이 회사는 지난 6월에는 ‘동원참치 라이트스탠다드’ 가격(캔당 3300원)은 그대로 두고 중량을 100g에서 90g으로 낮췄다. KFC는 기존에 비스킷을 구매하면 공짜로 주던 버터를 지난달 말부터 300원을 받고 팔고 있다. 오비맥주는 4월 카스 번들 제품의 개당 용량을 375mL에서 370mL로 줄였다.
슈링크플레이션은 가격에 민감한 소비자에게 제품값이 그대로인 것처럼 ‘눈속임’하는 상술인 측면도 있다. 최근 정부가 물가 관리를 위해 제품 가격 인상을 억제하면서 이런 현상이 심해지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농림축산식품부가 라면, 빵, 과자, 커피, 아이스크림, 우유, 설탕 등 7개 품목을 대상으로 담당 공무원을 지정해 관리하는 ‘전담 관리제’를 도입하면서 정부 눈치를 보는 기업 사이에서 슈링크플레이션이 더욱 기승을 부릴 것이라는 관측이 제기된다.
식품업계는 주정, 보리, 밀가루, 설탕 등 각종 원재료 가격이 치솟는데도 정부 눈치를 보느라 제품 가격을 마음대로 올리지 못하는 상황에서 제품 중량을 줄이는 건 불가피한 선택이라는 분위기다.
정부도 가격 인상 요인이 있다는 점은 어느 정도 수긍하고 있다. 다만 원재료 인상폭보다 제품 가격을 더 올리거나 용량을 줄이면서 사실상 g당 가격을 대폭 인상하는 건 소비자를 기만하는 일종의 ‘꼼수’라고 보고 있다.
이에 따라 식품 주무부처인 농림축산식품부와 물가 총괄부처인 기획재정부는 슈링크플레이션에 대해서도 모니터링을 강화하고 있다. 정부 고위 관계자는 6일 “식품업계의 제품 가격 인상뿐 아니라 슈링크플레이션도 면밀하게 모니터링하고 있다”며 “용량을 줄여 판매하는 방식으로 소비자에게 가격 부담을 전가하는 행위는 업계 간담회 등을 통해 자제를 당부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기재부는 이날 민생 물가 상승에 대응하기 위해 물가안정현장대응팀을 신설했다. 기재부 실·국장급 간부들은 이날부터 현장을 방문해 수급 현황을 점검하고 있다. 홍두선 차관보는 전남 해남군의 배추 농장과 진도군의 대파 농장을 찾아 작황을 점검했다. 이지호 민생경제정책관은 충남 아산시의 달걀 공판장을 방문해 달걀 가격과 수급 상황 등을 살펴봤다.
기재부는 농식품부를 비롯한 물가 관련 부처 합동으로 이번주부터 물가관계차관회의를 정례적으로 열 방침이다. 해양수산부도 박성훈 차관을 물가안정책임관으로 하는 물가안정대응반을 구성했다. 물가 관리품목인 명태 고등어 오징어 갈치 참조기 마른멸치를 비롯한 다소비 어종과 천일염 등 7개 품목의 물가 관리를 강화할 계획이다.
개별 품목 물가를 일일이 통제하는 정부 방식은 한계가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석병훈 이화여대 경제학과 교수는 “정부가 기업을 압박해 가격을 누르는 건 착시현상에 불과하다”며 “원재료값 상승 등 인상 요인이 뚜렷한데도 단기간의 성과를 위해 가격을 억누르면 나중에 가격이 폭등할 수 있다”고 말했다.
■ 슈링크플레이션
shrinkflation. 줄어든다는 뜻의 ‘슈링크(shrink)’와 물가 상승을 뜻하는 ‘인플레이션(inflation)’의 합성어. 제품 가격은 유지하는 대신 크기, 용량을 줄이거나 품질을 낮춰 간접적으로 가격을 인상하는 것이다. 영국 경제학자 피파 맘그렌이 2015년 만든 말이다.
강경민/박상용 기자 kkm1026@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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