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년 만에 보수가 정권을 재탈환한 만큼 인수위 역할은 그 어느 때보다 중요했다. 모든 정책 방향을 180도로 바꿔 새로 짜야 했고, 거기에 맞게 장·단기 전략도 재구축해야 했다. 하지만 한 달 보름이란 짧은 인수위 기간에 정권이 5년간 실행할 아젠다를 내놓기는 역부족이었다. 그렇게 인수위의 부실 보고서를 안고 정권이 출발했고, 그걸 바라보는 국민의 시선은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결과는 우려한 대로다. 정권 초기 탈원전 되돌리기, 단호한 노조 파업 대처 등 산발적인 대응은 있었지만 보수 정권 5년을 관통할 비전과 청사진은 없었다. 참모그룹 중 윤석열 정부의 아젠다를 고민하는 이는 보이지 않았고, 너도나도 위에서 떨어진 지시를 수행하기에 급급했다. 집권 2년차에 다급해진 윤석열 대통령이 직접 나서 ‘3대 개혁’을 외쳤지만, 디테일을 채울 참모와 내각은 허둥지둥했다.
개혁 1순위로 꼽힌 노동개혁만 해도 그렇다. 불법 파업에 대한 강경 대응 말고는 법이나 관행을 고쳐 착근시켜야 할 개혁 과제는 한 발짝도 진전을 보지 못했다. 산업 현장의 발목을 잡는 ‘주 52시간’ 문제 역시 주당 최장 근로시간을 몇시간으로 할지와 같은 지엽적인 이슈에 스스로 갇혀 유연근무제로의 개혁 취지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연금개혁도 논의만 무성하다 결국 보험료율이나 소득대체율 같은 핵심 숫자는 빠진 맹탕 개혁안을 내놓고 국회에 책임을 넘겼다. 교육개혁도 다르지 않다. 공교육 정상화라는 핵심 아젠다는 쏙 빠진 채 수능 킬러 문항 배제 같은 기술적인 이슈에 매달려 여론의 분란만 키웠다.
이렇게 시간을 허비하는 사이 잠재 성장률은 1%대로 추락하고, 실질 성장률이 그런 잠재 성장률조차 밑도는 지경에 이르렀다. 지금 우리 경제는 말 그대로 복합위기 상황이다. 외환위기, 금융위기를 두 번 다 겪은 한 전직 관료가 “경제가 골로 가고 있다”고 표현했지만 시장에서 느끼는 위기는 그야말로 태풍 전야나 다름없다. 이런 상황이라면 정부는 태풍이 어디로 북상할지, 강도는 얼마나 셀지부터 파악해야 하는데 부총리와 참모들은 위기 본질에는 눈감은 채 ‘이상 무(無)’만 외친다. 금리 환율 물가 등 모든 지표가 역방향이고 분기 성장률이 3분기째 제로로 추락한 상황에서 시장은 이미 올해 경기 흐름에 대해 ‘상저하저(上低下低)’를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 있는데, 추 부총리 혼자 “예상했던 상저하고(上低下高) 흐름이 가시화되고 있다”고 낙관한다. 경제 위기론을 꺼낼 때마다 관료들이 방어 논리로 제시하는 ‘자기실현적 위기(self-fulfilling crisis)’를 이번에도 걱정해서일까.
그나마 대통령 지시에 장관들이 일제히 현장으로 달려가 민생을 챙기는 것은 반가운 일이긴 하다. 하지만 우리가 현장을 몰라서, 정답을 몰라서 지금 헤매고 있는 것일까. 고물가에 신음하는 서민, 취업 못해 고통받는 청년, 고금리에 이자 부담이 큰 소상공인, 환율 급등으로 어려움을 겪는 중소기업인의 눈물을 몰라서 그런 것일까. 현장만 중시하다간 자칫 당장의 눈물을 닦아준답시고 경제원리가 정해놓은 선을 넘어 나중에 더 큰 눈물을 쏟게 하는 우를 범할지도 모른다.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이 정권이 남은 3년간 명운을 걸 아젠다를 세우고, 그것을 실행할 전략을 국민에게 제시해야 한다. 국민은 당장의 배고픔을 달래고 눈물을 닦아줄 빵이 필요한 게 아니고, 이 정권이 우리의 삶을 나아지게 만들어 줄 수 있다는 확신과 믿음을 원하고 있다. 정부·여당은 표를 얻을 정치공학이 아니라 확신과 믿음을 줄 전략으로 내년 총선에서 승부를 걸어야 한다. 지금 같은 단기적이고 즉흥적인 수로는 짧은 인기를 끌 수 있지만 민심을 길게 얻을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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