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접할 수 없는 사운드, 완벽한 테크닉, 빈틈없는 호흡.’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100년 넘게 세계 최정상 악단 자리를 굳건히 지켜온 이유다.
1882년 창단해 푸르트벵글러, 카라얀, 아바도 등 전설적인 지휘자들이 이끌어온 베를린 필이 6년 만에 내한한다는 소식에 지난 11일 서울 예술의전당은 공연 시작 1시간30분 전부터 인파로 북적였다. 유명 협연자 없이도 이토록 많은 이들의 관심이 쏠린 건 러시아 출신 명장(名匠) 키릴 페트렌코의 존재 때문이었다. 2019년부터 악단의 열두 번째 상임지휘자 겸 예술감독을 맡은 인물이자 현시점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지휘자로 평가받는 그가 새롭게 만들어낸 베를린 필의 소리를 기대하는 클래식 애호가가 그만큼 많았다는 얘기다.
첫 곡은 모차르트 교향곡 29번이었다. 페트렌코는 첫 소절부터 각 악기군의 소리를 섬세하게 조율하면서 견고한 음향을 만들어냈다. 현의 경쾌한 음색과 오보에가 만들어내는 명료한 선율, 호른이 펼쳐내는 풍성한 울림은 탄탄한 균형을 이루면서 모차르트 특유의 생기 있으면서도 우아한 에너지를 살려냈다. 이따금 들리는 호른 수석의 실수가 아쉽긴 했으나, 전체 구조는 흔들리는 법이 없었다.
현대음악 작곡가 베르크의 ‘오케스트라를 위한 세 개의 작품’에선 베를린 필의 저력을 유감없이 보여줬다. 짜임새와 구성이 복잡해 자칫 난잡하다는 인상을 남길 수 있는 작품이지만, 페트렌코는 끊어질 듯 끊어지지 않는 악구의 흐름을 긴밀히 조형하면서 음악적 긴장감을 살려냈다. ‘전주곡’에선 격렬한 악상을 전면에 드러냈고, ‘원무’에선 춤곡 모티브를 또렷하게 짚어내면서 신비로운 역동감을 불러일으켰다. ‘행진곡’에서 보여준 관현악의 폭발적인 에너지와 해머의 강렬한 울림은 청중을 장악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마지막 곡은 베를린 필의 시그니처 레퍼토리 중 하나인 브람스 교향곡 4번. 페트렌코는 소문대로 감정에 지나치게 치우치지도, 기교적인 요소만 과시하지도 않았다. 치밀하면서도 명료한 지시에 베를린 필은 하나의 유기체처럼 긴밀하게 움직이면서 브람스의 처연한 서정을 살려냈다. 브람스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짙고 어두운 색채, 감정적으로 휘몰아치는 극적인 효과를 기대했다면 그보다 담백하거나 단조롭다고 느꼈을 수 있으나 연주의 완성도는 최고 수준이었다.
하이라이트는 4악장. 페트렌코는 작품의 전경과 후경을 담당하는 악기군의 대비를 정확히 짚어내는 동시에 음향의 범위를 서서히 넓혀가면서 비극 속으로 침잠하는 브람스를 설득력 있게 그려냈다. 아주 얇은 종잇장을 차례로 덧대듯 섬세하게 변화하는 소리의 명도와 악상, 거역할 수 없는 힘에 밀려 쏟아지듯 자연스럽게 만들어내는 거대한 음향, 선율 간 이음새가 없는 것처럼 긴밀하게 주고받는 호흡이 특히 인상적이었다. 첫 음부터 이어진 절제의 과정을 거쳐 최후의 순간에 짙게 배어 나오는 브람스의 고독감은 단숨에 밖으로 터져 나오는 단편적인 감정과는 차원이 다른 압도감을 선사했다.
리허설을 단 1초도 일찍 끝내는 일이 없다는 페트렌코의 지휘는 누구보다 정교했고, 일말의 과장도 없었다. 그와 베를린 필이 써 내려갈 내일의 ‘음악적 이상(理想)’을 기다리게 할 만한 무대였다.
김수현 기자 ksoohyu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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