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귀족 집안의 아이로 태어난 로트레크는 사냥과 스포츠, 그림을 좋아하는 등 다재다능해 ‘작은 보석’이라고 불리는 귀공자였다. 하지만 자라면서 관절통과 골절에 계속 시달렸고, 152㎝에서 키가 멈춰버렸다. 어마어마한 재산을 다른 가문에 나눠주지 않기 위해 근친결혼을 반복하다 보니 로트레크는 농축이골증(pyknodysostosis)이라는 골격계의 상염색체 열성 유전병을 앓게 됐다. 지금은 왜소증을 비롯해 특징적인 골격 변화와 함께 카셉틴 케이(Catheptin K) 유전자의 변이로 진단되지만, 당시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희소병이었다. 그는 병원에서 치료받으며 실내에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실력을 키우기 위해 파리로 떠나 화가 르네 프랭스토 밑에서 공부했는데, 어릴 때부터 즐겨하던 승마에 대한 미련 때문인지 말을 자주 그렸다. 몽마르트르로 자리를 옮겨 본격적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한 그는 매춘부와 카바레의 댄서를 즐겨 그렸다.
당시 몽마르트르에는 ‘물랭루주’라는 최고의 사교장이 있었다. 로트레크는 그곳에서 캉캉 춤을 추는 댄서를 그린 포스터 ‘물랭루주, 라 굴뤼(Moulin Rouge, La Goulue)’로 일약 스타덤에 오른다. 당시 화가들의 고전적인 회화 기법과 달리 과감한 자르기, 선명하고 강렬한 색채, 굵고 진한 선과 글자 등으로 눈에 띄는 포스터를 그렸다. 주문자의 요구에 따라 주인공을 미화하거나 물랭루주를 선전하려는 기존 포스터와 달리, 로트레크는 댄서인 라 굴뤼만의 개성을 표현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이후 인기 있는 포스터를 그리며 로트레크는 사교계의 스타가 되지만 작은 신장과 특이한 외모로 인해 여성들로부터 외면당했다. 그는 술을 마시며 자신감과 활력을 찾곤 했지만 과도한 음주 끝에 술에 중독되기 시작했다. 어느 날 손과 발이 움직여지지 않더니, 결국 37세 나이에 죽음을 맞이했다.
로트레크의 포스터는 미술 작품이 광고 포스터로 활용되는 시초가 됐다는 점에서 현대 미술에 큰 의미를 남겼다. 그는 농축이골증으로 팔과 다리뼈가 잘 부러졌고 특히 손가락 끝마디 뼈의 뼈세포가 융해(acroosteolysis)됐다. 또 나이가 들면서 얼굴뼈도 변형돼 콧등은 볼록해지고 턱이 작아지는 증상을 겪으면서 심적으로 많이 힘들었을 것이다.
이재호 계명대 의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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