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고로 척수를 다쳐 하반신 마비가 된 환자가 걷습니다. 지난 5월 세계적인 학술지 네이처에 소개된 연구결과입니다. 스위스 로잔연방공대 연구진은 40세 네덜란드 남성의 뇌와 척수 사이 신경을 잇는 ‘무선 디지털 브리지’를 개발해 실험했습니다. 그랬더니 이 남성은 다시 스스로 서고 걸을 수 있게 됐습니다.
연구진은 뇌와 척수 사이에 물리적으로 끊긴 신경을 무선 통신망을 통해 연결했습니다. 다리의 움직임을 제어하는 척수에 전극을 심고, 뇌에서 받은 신호를 전달하도록 한 겁니다. 정상인처럼 환자가 걷겠다고 생각하면 걸을 수 있게 한 것입니다.
먹는 약이나 주사제처럼 환자 몸에 약물을 투입하지 않고 전기자극 등으로 질병을 치료할 수 있는 기술을 ‘전자약’이라고 부릅니다. 전자약 개념은 아직 생소할 수 있지만, 물리치료의 고주파치료를 생각하면 쉽습니다. 주로 전기자극이나 자기장 등을 이용해 신경을 조절하고, 이를 통해 질병을 치료하는 방식입니다.
전자약은 기존의 화학·바이오 의약품이 극복하지 못한 질병을 치료하는 데 집중하고 있습니다. 미국 블랙록 뉴로테크는 뇌에 컴퓨터칩을 심어 뇌졸중으로 말을 못 하는 사람들의 인공 언어장치를 개발하기도 했습니다. 뇌나 척수에 전극을 꽂는 전자약만 있는 건 아닙니다. 오히려 전자약은 대부분 몸에 시술이나 수술이 필요하지 않은 ‘비침습적’ 기전을 가지고 우울증, 불면증, 치매, 자폐증 등 난치성 질환 치료에 활용됩니다.
지난 10월 미국 식품의약국(FDA)은 뉴로발렌스의 불면증 치료용 전자약 ‘모디우스 슬립’에 대한 승인 결정을 내리기도 했습니다. 이 전자약은 헤드셋 모양으로 생겼습니다. 귀 뒷부분에 전극이 닿게 해 수면과 각성주기를 주관하는 뇌의 시상하부 영역을 자극해서 불면증을 개선해줍니다. 잠들기 전 30분 동안 헤드셋을 착용하고 있으면 수면의 질이 개선된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뉴로발렌스는 제2형 당뇨병과 비만에 대한 전자약도 개발 중입니다. 미국 칼라헬스는 파킨슨 환자의 손떨림 증상을 개선하는 스마트 워치 개발에 성공하기도 했습니다. 손떨림 현상이 발생하면 스마트 워치가 자동으로 신경에 전기 자극을 주는 방식으로 수전증을 개선해줍니다.
국내서 전자약이 처음 등장한 건 2003년입니다. 국내 1호 전자약 기업 리메드가 병원용 만성통증용 전자약을 개발한 것입니다. 2021년에는 웨어러블 전자약이 등장하면서 다시 세간의 주목을 받았습니다. 와이브레인의 우울증 치료용 전자약 마인드스팀은 헤어밴드 형태로 의사 처방만 있으면 집에서도 치료가 가능합니다. 뉴아인의 편두통 완화기기 ‘일렉시아’는 처방 없이도 사용할 수 있는 웨어러블 전자약입니다. 이 제품은 FDA 허가도 받았습니다.
리메드와 뇌질환 치료 스타트업 뉴로핏은 치매를 치료하는 전자약을 개발 중입니다. 뇌에 전기자극을 주면 세포 내 신호전달 경로인 단백질 및 유전자 등을 활성화하는 효과가 있는데 인지장애 발현 속도를 늦추는 데도 도움이 된다고 합니다. 다만 아직까지 임상 단계여서 2~3년 뒤 실용화될 전망입니다.
오현아 기자 5hyu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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