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의 겨울 채소에는 특별한 생명력이 있다. 날이 조금이라도 추워지면 금방 얼어 물렁해지는 육지 채소와 다르다. 평균 기온이 높고 따뜻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제주의 화산 토양은 가볍고 물이 잘 빠져 특히 뿌리식물이 자라기 좋다.
겨우내 제주의 채소들은 밤부터 새벽까지 기온이 떨어질 땐 살짝 얼었다가 낮에는 녹는 과정을 반복한다. 작물들은 살아남기 위해 주변 영양분을 힘차게 빨아들인다. 그러면서 점점 강해지고 달콤해진다. 수확이 끝나는 계절, 제주의 채소들은 그 다채로운 색이 더 짙어진다.
무, 당근, 양파부터 브로콜리, 양배추, 콜라비까지. 검은 돌이 겹겹이 올려진 밭담을 바람막이 삼아 안온하게 둘러싸인 채소밭은 제주 어디에서나 쉽게 볼 수 있다. 제주의 밭은 요즘 ‘제주밭한끼’ 프로젝트로 붐빈다. ‘제주에서 나는 채소로 지역을 살리고 알릴 수 없을까.’ 마을 주민과 상생하는 방법을 고심하던 농림축산식품부와 제주시가 제주시농촌신활력플러스사업추진단과 함께 나섰기 때문이다. ‘제주 밭작물로 즐기는 근사한 일상’이 테마다. 올해로 두 번째, 11월 한 달간 열리는 이 행사를 지난 주말 찾았다.
람사르 습지를 품고 있는 선흘마을에선 메밀, 당근, 양배추 등이 많이 자란다. 이곳은 자신의 이야기를 그려 집과 창고에 갤러리를 열어 전시하는 그림 할망들로도 유명하다. 선흘마을의 아름다운 자연과 사람, 음식을 선보이기 위한 ‘선흘투어’에 지난 17~18일 동행했다.
선흘곶 동백동산습지센터에서 출발해 선흘 습지의 정수인 ‘먼물깍’, 할망들이 도슨트로 나서 그림을 해설해주는 ‘선흘 할망 갤러리’, 제주 4·3 유적지로 복원된 ‘낙천동 4·3성지’를 둘러본 뒤 끝없이 펼쳐진 야생 꽃밭에서 식사를 하고 돌아오는 프로그램이다. 마을 사람들은 선흘의 밭에서 나는 제철 작물들로 비건 도시락 ‘선흘식탁’을 만들었다. 선흘동백꽃밥, 당근라페파스타, 그릴드 유부당근 고사리랩 등 채식 메뉴로만 구성됐지만 알록달록한 색감으로 어우러진 선흘식탁은 배고픔을 달래는 데 전혀 부족함이 없었다.
귀덕마을에선 18일 ‘송키 페스타’가 열렸다. 송키는 제주말로 채소를 뜻한다. 귀덕마을 주민들은 밭작물로 전통주를 담그고, 이와 페어링하기 위한 채소 안주를 개발했다. 여러 과정을 거친 끝에 ‘밭, 한잔’이라는 브랜드로 딸기·비트 막걸리와 단호박 막걸리를 내놨다. 브로콜리, 애호박 등 각종 채소 구이와 감자 크로켓, 푸른콩과 비트를 으깨어 만든 디핑소스는 훌륭한 덤. 귀덕향사에서 열린 이날 행사에선 주민들이 개발 과정을 직접 설명했다.
밥보다 빵을 더 좋아하는 ‘빵순이와 빵돌이’를 위해 제주에서 손꼽히는 베이커리 다섯 곳도 제주밭한끼 행사에 가세했다. 메밀, 독새기콩, 보리 등 모두 제주에서 생산되는 밭작물만으로 새로운 빵을 개발해 ‘신기루빵집’ 팝업 행사에서 신제품을 선보였다.
SNS를 통해 사전 신청한 150여 명의 참가자는 이날 마음껏 빵을 시식했다. 앞으로 각 매장에서 계속 판매된다고. 주말 이틀간의 이벤트는 마을의 터전이 되는 ‘밭’과 그 밭에서 함께 삶을 일구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더해져 우리의 식탁이 얼마나 더 풍성해질 수 있는지를 보여줬다. 제주밭한끼 인스타그램(@jejubaat)과 제주밭 홈페이지에 행사들이 계속 업데이트된다니 이제 제주에 간다면 맛집 정보를 찾는 대신 밭으로 먼저 달려가 보시길.
제주=이금아 기자 shinebijou@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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