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나름 미루기를 잘한다. 어쩌면 좋아한다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나에게 예정된 회사, 개인 일정과 같은 모든 일을 최대한 미룰 수 있을 때까지 미뤄서 일을 치르는 편이다. 대신 마감일을 어기거나 마감에 허덕이느라 불만족하게 일을 처리하는 경우는 잘 없다. 내가 일을 잘 미루는 방법은 거의 강박에 가까울 정도로 개인 스케줄러를 꼼꼼하게 정리하는 것이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구글 캘린더를 확인하고 세부 시간과 행위를 기록한다. 회사 업무는 물론 이동 시간, 독서 시간, 심지어 식사나 운동할 때 넷플릭스로 어떤 영화를 볼 것인지까지 기록해둔다.
MBTI에서는 이런 사람을 계획적인 J형으로 분류한다. 하지만 나는 해외여행도 출발 직전에 항공권과 숙소를 결제하는 사람이라 그다지 계획적이지 않다. 다만 현재 주어진 일에 몰입하기 위해 수많은 일상과 생각을 스케줄러에 모조리 던져버리고 마는 것이다. 일단 스케줄러에 할 일을 던지고 나면 바로 잊어버린다. 오로지 그곳에 적힌 지금 이 순간 해야 할 일을 충실하게 수행하면 되니까 말이다.
팀 어번이 테드 인기 강연자가 된 배경은 공감할 만한 미루기 버릇을 소개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는 우리가 어떤 일을 미루는 종류가 두 가지라고 제시했다. 바로 마감일이 정해진 일인지, 정해져 있지 않은 일인지 여부다. 마감이 정해진 일은 벼락치기 기술을 터득하면 비교적 잘 미룰 수 있다. 하지만 많은 사람이 시작조차 못 하고 미루는 것들은 대개 마감일이 없는 유형이다. 건강 챙기기, 가족 돌보기, 불필요한 관계 끊기 같은. 이 역시 많은 사람이 공감하는 목표지만, 그 누구도 시작일이나 마감일을 말해주지 않기에 무엇보다도 엄격한 자기 검열과 시행착오가 필요한 일이다.
미루기를 잘한다고 자부했으나 정작 내 인생의 소중한 가치들을 한없이 미루고만 있는 것 같아 반성하고 말았다. 연말이 다가오면 연초 세운 버킷리스트를 또 얼마나 미뤘는지 점검할 것이다. 내년 버킷리스트에는 결과물이나 마감일이 뚜렷한 목표가 아니라 매일 가족에게 전화하기같이 늘상 미루고 마는 계획을 1순위로 넣어보는 건 어떨까 싶다. 물론 이번 칼럼도 마감 전날까지 미뤄서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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