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단 가자지구만이 아니다. 우크라이나와 과거 유고, 르완다, 콩고, 수단 등의 무력 분쟁에서 많은 민간인이 희생됐다. 20세기 초 무력 분쟁으로 인한 사상자 가운데 민간인은 5%에 불과했으나 21세기 초에는 90%에 달했다.
바야흐로 전쟁의 최대 희생자가 군인이 아니라 민간인인 시대가 됐다. 민간인을 전쟁의 참화로부터 보호하려는 인류의 노력은 중세 이후 계속돼 왔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뉘른베르크와 도쿄 군사재판소는 평화에 반한 죄, 전쟁범죄와 인도에 반한 죄를 저지른 개인을 처벌했다. 유고, 르완다, 동티모르, 시에라리온, 캄보디아에서는 특별재판소를 설치해 국제인도법 위반자를 소추·처벌했다. 2002년에는 독립적이고 상설적인 국제형사재판소가 출범해 집단살해죄, 인도에 반한 죄, 전쟁 범죄 및 침략 범죄를 범한 개인을 처벌할 수 있게 됐다.
전쟁 행위와 수단을 제한함으로써 불필요한 살상과 무익한 파괴를 막기 위해 많은 조약이 체결됐다. 1949년 전시 민간인 보호에 관한 제네바협약이 대표적 예다. 이와 같은 노력에도 국제인도법의 핵심 원칙인 ‘비례의 원칙’과 ‘구별의 원칙’은 자주 무시됐고 민간인 희생은 증가했다. 그 배경으로 현대전의 특성을 들 수 있다. 현대전은 총력전이다. 국력을 총동원하는 전쟁에서 민간인과 전투원의 구별은 어렵다. 실제로 우크라이나와 가자에서는 민간인이 전투원이나 정보원으로 활약하고 있다.
일부 국가는 민간인과 전투원의 구분이 모호한 군사전략을 채택하고 있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실행 중인 하이브리드 전쟁이나 중국의 회색지대 전략이 그것이다. 무엇보다 전쟁법에 대한 무용론, 국제재판소 역할에 대한 회의론과 대량 살상으로 적의 사기를 조기에 꺾겠다는 의도 등이 민간인 희생이 증가하는 주요 원인이다.
그러나 무차별적인 민간인 살상은 전쟁 목적을 효과적으로 달성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역사에는 무차별 폭격과 살육이 민간인의 사기를 꺾기는커녕 도리어 저항 의지를 키웠음을 보여주는 사례가 많다. 무고한 민간인의 희생은 저항을 영속화해 전후 평화 재건을 어렵게 한다. 오히려 한정된 자원으로 전투원과 군사 목표에 집중하는 것이 승리의 첩경일 것이다.
또 전쟁법 준수는 군사행동에 정당성을 부여하고 국제적 지지 획득을 용이하게 한다. 지난달 17일 가자지구 알리 아랍병원이 폭발하자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아랍 지도자 간 정상회담이 취소되고 휴전 촉구 시위가 세계적으로 확산한 것은 여론의 폭발성과 중요성을 웅변한다. 북한의 무차별 포격과 핵위협에 노출된 한국은 전시 민간인 보호에 앞장서야 한다. 국제인도법·인권법 준수를 외교의 핵심 가치로 천명하고 국제 협력을 주도해야 한다.
교전 당사자에 대한 정치·외교적 고려와는 별도로 성폭력 및 아동 폭력 방지에 관심을 표명하고 국제인도법 준수를 촉구해야 한다. 원격 조종 무기체계, 자율무기 체계, 사이버 등 신기술 및 신무기에 대한 새로운 규범 제정 노력에도 능동적으로 참여해야 한다. 이는 글로벌 중추 국가로서 가치 외교의 비전에 부합할 뿐 아니라 국가 이미지를 제고한다. 무엇보다 전쟁법 위반자의 기소·처벌 가능성을 열어두는 것은 대북 억지력에 도움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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