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늘 구두를 신으면 슈퍼 히어로가 되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고 했는데요. '렌트'에서 엔젤 역할을 맡으면 '초 슈퍼 히어로'가 된 것 같은, 영웅이 된 것 같은 기분 좋은 느낌으로 역할에 임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뮤지컬 '렌트'에서 엔젤 역을 소화하고 있는 가수 겸 뮤지컬 배우 조권은 작품과 배역에 대한 애정을 드러내며 이같이 말했다.
'렌트'는 뉴욕 이스트 빌리지에 모여 사는 가난한 예술가들의 꿈과 열정을 그린 작품으로 1996년 미국 브로드웨이에서 초연됐다. 한국에서는 2000년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서 첫선을 보여 올해 벌써 아홉 번째 시즌이 무대에 오르고 있다.
작품은 좌절과 실패의 파도 속에서도 서로에 대한 사랑을 바탕으로 삶에 대한 희망을 잃지 않는 청춘들의 이야기를 다룬다. "내일은 없어, 오직 오늘뿐"이라는 메시지를 주는 넘버 '노 데이 벗 투데이(No day but today)'와 1년 365일을 분 단위로 환산해 52만5600분으로 표현하며 매 순간 사랑하자고 말하는 '시즌스 오브 러브(Seasons of love)'는 세계 수많은 관객의 공감을 얻은 대표 넘버다.
이 작품에서 조권은 반짝이는 은색 구두에 단정한 단발, 트리를 연상케 하는 깜찍한 치마 의상을 입고 등장한다. 그가 연기하는 '엔젤'은 드래그 캐릭터로 긍정의 에너지로 주변인들에게 '아낌없이 주는 사랑'을 실천하는 인물이다. 삶과 사랑에 관해 이야기하는 '렌트'에서 가장 강한 여운을 안기는, 빠져선 안 될 중요한 캐릭터다.
최근 서울 강남구 삼성동 코엑스 신한카드 아티움에서 만난 조권은 "엔젤을 하는 것에 대한 자부심이 매우 크다. 아무나 못 한다고 생각한다"면서 "오래전부터 뮤지컬 팬분들께서 '조권의 엔젤이 궁금하고 보고 싶다'고 써준 글을 봤다. '엔젤을 하게 된다면 잘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해봤는데 자신감이 없어지기보다는 더 잘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털어놨다.
그렇게 '렌트' 오디션이 열리기만을 기다렸다는 그였다. 조권은 "'렌트'가 언제 하는지 주시하고 있었다"면서 웃음을 터트리고는 "오디션 공고가 떠서 곧바로 회사에 너무 하고 싶다고 얘기했다. '이제 내 시간이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밝혔다.
떨리는 마음을 부여잡고 최대한 자신감 넘치는 모습으로 오디션장에 들어섰다고 했다. 당시 조권이 선택한 신발은 역시나 은색 구두였다. "어떻게 해야 제 진짜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지 고민했어요. (캐스팅이) 되든 안 되든 제 존재감을, 제가 특별한 사람이라는 것을, 수많은 특별한 사람 중에 저 같은 특별함도 있다는 걸 보여드리고 싶었어요."
사실 '렌트'와의 인연은 한참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JYP엔터테인먼트에서 가수 데뷔를 준비하고 있던 2002년 같은 회사 소속이었던 그룹 원더걸스 출신 선예가 '렌트'를 보고 와 조권에게 '엔젤' 역할을 추천했던 것.
조권은 "김호영 형이 정선아 누나랑 같이 데뷔 공연할 때였는데 중학교 1학년이었던 선예가 보고 호영이 형 팬이 됐다. 당시 형에게 '오빠처럼 하얗고 예쁘장하고 귀여운 절친이 있는데 그 친구가 나중에 커서 오빠의 엔젤 역을 하면 찰떡일 것 같다'고 했다더라. 나한테도 와서 '김호영이란 오빠가 있는데 너무 예쁘고 잘한다. 너 생각이 나더라'고 말했었다"고 전했다.
'렌트'가 데뷔작인 김호영은 이번 시즌을 끝으로 엔젤과는 작별할 예정이다. 그는 조권에게 "인수인계하겠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조권은 "형이 대기실에서 할아버지 흉내를 내면서 '21년째 하고 있다'고 장난을 치더라. 저런 장난을 김호영 말고는 감히 누가 칠 수 있겠느냐"면서 "21년째 엔젤 역을 하는 형을 보면서 존경심이 들었다. 호영이 형이 있었기에 엔젤의 바통을 이어받을 수 있지 않았나 싶어 감사하다"고 고백했다.
작품과 배역에 대한 남다른 책임감과 자부심을 갖고 매회 무대에 오르는 조권이었다. 자신만의 '엔젤'을 만드는 것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보통 엔젤 배우들은 6~7cm 높이의 힐을 신었던 것과 달리 조권은 무려 12cm 높이 구두를 신는다.
그는 "브로드웨이 영상을 보니 엔젤의 굽이 정말 높더라. '나도 질 수 없다', '대한민국에도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면서 "엔젤을 사랑하는 만큼 굽을 올렸다"며 웃었다.
물론 작품의 메시지와 깊이를 표현하는 일은 더 중요했다고 한다. 조권은 "엔젤로서 표현해야 하는 게 정말 많았다. 구두를 신고 춤을 추거나 계단에서 뛰어내리고 점프하는 등의 테크닉적인 부분은 트레이닝 기간도 꽤 있었고 내가 가진 본연의 무기가 있었지만 드라마를 끌고 가는 힘은 더 고민해야 했다"고 말했다.
엔젤과 하나가 되는 데 있어서 큰 도움이 된 건 연습 중 앤디 세뇨르 연출을 중심으로 진행된 '테이블 워크'였다고. 전 출연 배우들이 연습실에 모여 동그랗게 둘러앉아 '자기 이야기'를 하는 시간이었다.
조권은 "이런 신비로운 경험은 처음이었다"면서 "쉽게 말하면 발가벗는 거다. 본인이 지닌 슬픔, 각자의 이야기를 하는데 정말 각양각색의 드라마가 있더라. 슬퍼서 혹은 감동 받았거나 기뻐서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전원이 사연을 말하는 데 두 시간이 걸렸다"고 전했다.
이어 "한 바퀴를 돌고 나니 서로 만난 지 얼마 안 됐는데 이상하게 가까워졌다. 그 이후에 '시즌스 오브 러브'를 부르라고 하더라. 눈물바다였다. '렌트'이기 때문에 가능한 연습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소름 끼칠 정도로 감동적이었다. 앤디 연출님이 이 감정을 잊지 말고 그대로 극장에 가져가라고 하더라"고 덧붙였다.
조권이 꺼낸 이야기는 무엇이었는지 묻자 "어렸을 때 별종이란 얘기를 정말 많이 들었다. 여성스럽다, 특이하다, 쟤는 뭔가 우리랑 다른 것 같다, 틀린 것 같다 등의 이야기였다. 너무 튀니까 왕따도 당했다. 또 어린 나이에 노래와 춤을 하니까 그마저도 시기, 질투하는 친구들도 있었을 거다. 그런 아픔의 상자를 하나씩 꺼냈다"고 답했다.
"극장 오는 게 즐겁다", "매회 공연하는 게 즐겁다" 등 입에서 나오는 말 하나하나가 '조권 엔젤'을 더욱 기대하게 했다. '렌트'는 그의 뮤지컬 행보에 분명한 전환점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권은 "극장 오는 게 설레는 건 처음인 것 같다.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스트레스를 받으면 '내일도 공연인가'라는 생각이 들 수 있는데 그런 것들을 다 제치고 '내일도 공연이다!'라면서 느낌표가 붙는다. 긍정적인 감정이 풍부한 상태다. 뮤지컬은 하루하루 무대 위에서 생동감을 표현해야 하지 않냐. 내 안의 아드레날린을 솟구치게 하는 매력이 있다"며 미소 지었다.
그러면서 "동성애, 마약, 에이즈 등 굉장히 도발적인 소재들이 등장하지만 사실 작품을 보면 이 장치들은 생각했던 것만큼 자극적이지 않게 다가온다. 공연을 보고 나가는 분들은 따뜻한 마음을 안고 귀가하신다"며 "'렌트'라는 작품이 주는 힘 때문에 어떠한 에너지가 생긴다. 무대를 하는 우리가 그보다 더한 에너지를 얻으니까 이 작품은 유난히 '사랑의 힘'이 대단한 작품이지 않나 싶다"고 덧붙였다.
'프리실라', '제이미'에 이어 또다시 드래그 캐릭터를 연기하는 것에 대해서도 솔직한 생각을 밝혔다.
"이렇게 잘 맞춰온 옷만 입는 게 맞는 건지, 아니면 헐렁하고 안 맞는 옷도 입어보는 게 맞는지 고민이 없을 순 없죠. 제가 구두 신고 퍼포먼스 하는 역할만 한다고 생각하진 않는데, 분명한 건 제게 주어진 달란트(소명)라는 거예요. 이건 제가 바꿀 수도 없고 누군가가 바꿀 수도 없죠. 이걸 어떻게 잘 사용해서 보석처럼 빛날 수 있게 해줄지, 영리하게 작품을 선택할 수 있게 해주는 힘의 원천입니다. '렌트'도 그런 작품이에요. 엔젤 역할로 너무 예쁘고 소중하고 반짝반짝 빛날 수 있게 해주죠. 전 카테고리에 국한되지 않는다 생각해요. 앞으로도 반짝거리는 역할, 제가 잘 할 수 있는 거라면 할 거예요. '조권이라서', '조권만이', '대한민국에서 대표적인 아티스트다'라는 말을 듣는 게 궁극적인 목표입니다."
한편 '렌트'는 내년 2월 25일까지 코엑스 신한카드 아티움에서 공연한다.
김수영 한경닷컴 기자 swimmingk@hankyung.com
관련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