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는 12월 13일 15:05 마켓인사이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국내 기업공개(IPO) 수요예측에 참여하는 기관투자가는 2000여곳에 달한다. 이 가운데 비상장사 기업가치 산출(밸류에이션) 능력을 갖춘 곳은 많지 않다. 대형 자산운용사의 수요예측 참여 전략에 따라 눈치 게임을 벌인다. 수요예측에서 흥행하면 청약 경쟁률도 치솟고, 상장 직후 주가도 '오버슈팅'할 가능성이 높다. 상장 직후 공모주 이상 급등을 쫓는 일반투자자가 쏠리는만큼 수요예측에서 줄을 잘 서면 쉽게 단기 차익을 거둘 수 있다는 공감대가 있다.
공모주는 리스크 가능성을 염두에 둔 고난이도의 투자 판단이 필요한 영역이지만, 오히려 차익 규모와 안정성 측면에서 뛰어난 안전 투자처로 탈바꿈하는 셈이다. 이를 노려 고액자산가가 직접 기관으로 변신하는 사례도 우후죽순 등장하고 있다.
밸류에이션은 뒷전, 단기 차익 쫓는 세력화
13일 투자은행(IB) 업계에 따르면 다수의 중소형 운용사가 IPO 수요예측을 앞두고 일부 대형 운용사에 일정 금액을 지불하고 공모주 자문 서비스를 받고 있다. 해당 리포트에는 간략한 기업 개요 및 전망과 함께 수요예측 참여 여부, 적정 주가, 신청 가격, 신청 수량 등 이른바 ‘수요예측 참여 전략’이 기재된다. 보호예수 설정 여부 및 적정 매도 시기까지 담겨있다.
중소형 운용사는 이를 토대로 수요예측에 참여하고 있다. 사실상 밸류에이션 대행을 맡기는 행태다.
한 대형 자산운용사의 공모주 자문 서비스를 받는 곳만 수백여 곳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이 모두 동일한 전략으로 수요예측에 참여하며 일종의 세력화가 됐다는 게 IB 업계의 공통된 인식이다. 원하는 가격대에서 많은 공모주 물량을 받아내기 위해 같은 가격에 대거 주문을 넣는 방식이다.
원래 자체 밸류에이션 역량이 없는 기관투자가는 더 많은 공모주를 배정받기 위해 다른 기관의 주문 상황을 살피며 공모가를 적어내는 행태를 벌여왔다. 공모주 자문 서비스는 수요예측 기관 눈치게임의 컨센서스를 모아주는 역할을 한다. 결국 수요예측의 공모기업 가격 발견 기능을 더욱 왜곡하고 있다는 게 전문가들 지적이다.
공모주 자문 서비스를 받는 다수의 기관이 수요예측에 비슷한 가격과 보호예수를 제시하고 상장 이후 동일한 매도 전략을 취하자, 다른 기관들도 이를 따라 움직이며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다.
대형 증권사 IPO본부장은 “자체적으로 기업가치를 산정해 수요예측에 참여하던 일부 운용사조차 점차 수요예측에 참여하길 꺼리기 시작했다”며 “자체 산정한 가격을 적어봤자 의미가 없을 뿐더러 경쟁이 지나치게 치열해져 내부적으로 유의미한 공모주 물량을 받을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IB업계에선 현재 IPO 수요예측에 참여하는 기관투자가 2000여곳 중 실제 자체 밸류에이션 관련 조직을 운영하는 곳은 50여곳에 불과하고 보고 있다.
공모주 자문 서비스는 수요예측 이전에만 이뤄지지 않는다. 수요예측이 진행되는 중간에도 발행된다. 수요예측 초반 높은 가격에 기관의 주문이 들어와 무난한 흥행을 점치다가도 부정적 내용을 담은 자문 보고서가 발행되면 갑작스럽게 상당수의 기관 주문이 낮은 가격으로 일괄 수정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다수가 동일한 전략을 취하면 손실을 볼 가능성이 그만큼 낮아지는 만큼 공모주가 안정적 수익을 낼 수 있는 황금알이 되는 셈이다.
이들은 주관사에 흥정을 걸어오기도 한다. 자신과 함께 움직이는 기관이 수백곳에 달하는 만큼 수요예측 흥행을 원하면 일정 수준의 공모주 물량과 공모가를 담보해달란 식이다.
IB 업계 관계자는 “수요예측에 몇개 기관이 들어왔는지가 IPO 흥행 여부를 가늠하는 지표로 활용되고 있는 상황을 악용하는 것”이라며 “해당 IPO 기업의 기업가치가 얼마인지보단 단기적으로 안정적인 수익을 낼 수 있을지에만 몰두하는 기관이 우후죽순 늘어나더니 이젠 이들이 수요예측 결과를 좌지우지하는 상황까지 됐다”고 말했다.
사모 운용사·자문사로 꼼수 부리는 고액자산가
2020년부터 공모주 시장이 활황세를 보이자 수요예측에 참여하는 기관이 대거 급증한 것으로 알려졌다. 코스닥 벤처펀드 등을 운용하는 사모 운용사가 우후죽순으로 늘어나면서다. 고액자산가들이 투자자문사 또는 사모펀드 전용 운용사를 직접 설립하거나 인수하기도 했다. 운용사들이 특정 고액자산가 전용 펀드를 만들어 운용하는 일도 빈번하다. 일반투자자도 공모주 펀드를 통해 기관 배정 공모주 물량을 간접적으로 받을 수 있으나, 직접 기관으로 참여하면 더 많은 물량을 받을 수 있다. 청약금액의 50%를 증거금을 내야하는 일반투자자와 달리 기관투자가는 증거금을 내지 않아도 된다.
투자일임회사 또는 자산운용사와 고액자산가를 연결해하는 브로커도 등장했다. 이들은 고액자산가에 접근해 기관 대상 공모주 물량을 받을 수 있다며 영업활동을 한다. 더 나아가 일부는 고액자산가의 자산운용사 매입이나 설립을 도와주고 직접 운용사 대표를 맡아 공모주 청약을 사실상 대행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이런 기관의 경우 2~3명의 인력이 이름을 등록해두고 공모주를 통한 단타 매매가 유일한 수익원인 경우가 대다수다.
이들은 공모주 우선 배정 혜택이 있는 코스닥벤처펀드나 하이일드펀드도 적극 활용한다. 전체 자산의 일정 비율을 코스닥벤처기업 주식이나 신용등급 BBB+ 이하 채권에 투자하면 각각 공모주 물량의 30%, 5%를 우선 배정 받을 수 있다.
올해 IPO에 나선 50여곳의 수요예측 결과를 살펴보면 코벤펀드 및 하이일드펀드 중 공모 펀드 운용사는 20여개에 불과했다. 반면 사모펀드 운영사는 500여곳에 달한다. 공모펀드 자산규모는 평균 1000억원 수준이지만, 사모펀드의 경우 약 100억원으로 10분의 1 수준에 그쳤다.
IB 업계 관계자는 “일부 기관투자가의 수요예측 참여 주문금액은 10억원 수준으로 일반청약에 참여하는 일부 고액자산가보다 못한 수준”이라며 “코벤펀드 등이 고액자산가 위주의 사모펀드 중심으로 꾸려지면서 공모 펀드를 통해 다수 투자자에 공모주 혜택을 제공하겠단 취지가 퇴색됐다”고 말했다.
최석철 기자 dolsoi@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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