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라오케 간 날 기억해요? 거기 여자들 두 명 있었잖아요? 그중 키 작은 여자 만났는데 거의 결혼할 뻔했었거든요.”
“왜 안 했어?”
“(전화)번호를 잃어버렸거든요.”
“전화번호부에 나오잖아?”
“이름을 몰라요.”
“그럼 괴로울 만 하지.”
오는 20일 개봉하는 핀란드 영화 ‘사랑은 낙엽을 타고’에서 남자 주인공 홀라파(주시 바타넨 분)가 한 주점에서 나이 많은 직장 동료 한스네(얀 히티아이넨)와 맥주를 마시며 나누는 대화다. 두 남자는 사뭇 진지하면서도 별 표정 없이 툭툭 말을 주고받는다.
핀란드 거장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스무 번째 장편 영화인 이 작품은 헬싱키를 배경으로 한 독특한 로맨틱 코미디다. 비정규직이거나 일용직 근로자인 두 남녀의 척박한 노동 환경을 현실적으로 묘사하면서, 이런 역경을 이겨내고 기적처럼 서로를 찾는 이야기를 동화처럼 펼쳐낸다. 무표정하게 농담을 내뱉고, 건조한 유머를 구사하는 카우리스마키 특유의 ‘데드팬(deadpan)’ 스타일로 달곰씁쓸한 웃음을 유발한다.
여자 주인공 안사(알마 포이스티)는 유통기한 만료로 폐기해야 할 샌드위치를 노숙자에게 주기도 하고, 가방에 챙겼다는 이유로 슈퍼마켓에서 해고당한다. 홀라파는 이 공장, 저 공장 떠돌아다니며 일하는 곳에서 숙식을 해결하는 노동자다. 어느 금요일 밤 동료와 함께 놀러 간 가라오케에서 두 사람은 대화 없이 짧지만 강렬한 눈길을 나눈다.
두 사람은 안사가 주방 보조원으로 일하게 된 ‘캘리포니아 펍’ 앞에서 우연히 마주치고, 경찰이 펍 주인을 마약 판매 혐의로 체포하는 현장을 함께 목격한다. 이날은 안사가 이곳에서 처음 월급 받는 날. 홀라파는 월급을 못 받게 된 안사에게 커피도 사주고, 극장에 데리고 가서 영화도 함께 본다.
두 사람의 첫 데이트 장소인 영화관에는 장 뤽 고다르, 로베르 브레송 등 20세기 중후반 프랑스 영화 감독들의 옛날 영화 포스터가 붙어있다. 이들이 함께 보며 공감을 나누는 영화는 카우리스마키 감독과 친분이 있다는 미국 감독 짐 자무시의 좀비 코미디 영화 ‘데드 돈 다이(the dead don’t die)’(2019)다.
결혼까지 생각할 만큼 금세 상대에 빠져든 홀라파는 이렇게 말한다. “그럼 또 만날까요? 근데 이름도 모르네요.” 안사는 “(이름은) 다음에 알려줄게요” 하면서 자신의 전화번호를 종이에 적어 홀라파의 점퍼 주머니에 집어넣는다. 하지만 이 종이를 홀라파가 실수로 흘려버린다. 서로의 이름도 모르는 두 사람은 상대를 애타게 찾아다닌다.
우여곡절 끝에 다시 만난 두 사람. 안사는 홀라파를 집에 초대해 음식을 대접한다. 식사 도중 안사 몰래 위스키를 들이키는 홀라파. 그는 “술을 마셔 우울하고, 우울해져 술을 마신다”는 술꾼이었다. 안사는 “아버지와 오빠는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세상을 떠났고, 어머니는 이를 슬퍼하다 돌아가셨다”며 “당신은 좋지만, 술꾼은 싫다”고 잘라 말한다. 이 얘기를 들은 홀라파는 별말 없이 안사의 집을 떠난다. 외로운 영혼의 두 사람은 이 난관도 뚫고 다시 만날 수 있을까.
극 속 근로 상황과 인물들의 감정 교류는 지극히 현실적인 반면, 시간적 설정은 ‘영화적’이다. 안사가 잠시 일했던 주점 벽에 붙어있는 초대형 달력에는 ‘2024년’이라고 적혀 있다. 엄밀히 따지면 미래에 일어날 일인데, 두 사람은 통화 기능만 겨우 되는 구식 휴대폰을 사용하고, 안나 집에 있는 구형 라디오에서는 2022년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공습하고, 두 나라가 전투를 벌여 사상자가 발생한 소식이 실시간 뉴스처럼 계속 흘러나온다. 영화는 로맨스 코미디를 표방한 것과는 무색하게 이웃 나라에서 일어나는 전쟁의 참상을 끊임없이 상기시킨다.
이 작품은 2017년 베를린 국제영화제 은곰상(감독상)을 받은 ‘희망의 건너편’을 그의 마지막 영화라고 발표했던 카우리스마키 감독이 은퇴를 번복하고 6년 만에 내놓은 복귀작이다. 복귀의 변(辯)이기도 한, 이 영화에 대한 감독의 짧은 코멘트는 되새길 만하다.
“(나는) 그동안 주로 폭력적인 영화를 만들어오면서 과분한 평판을 얻었다. 하지만 인류를 파괴하는 전쟁에 시달리자 마침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주제에 관해 글을 쓰기로 결심했다. 사랑에 대한 갈망과 연대, 희망, 타인에 대한 존중, 자연, 삶과 죽음이 바로 그것이다. 그 주제들이야말로 (영화화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 영화를 통해 로베르 브레송, 오즈 야스지로, 찰리 채플린에게 소소한 경의를 표한다.”
브레송과 야스지로, 채플린은 코멘트에서 언급된 주제들을 각자의 작품 속에 멋들어지게 담아낸 영화감독들이다. 카우리스마키 감독도 이 영화에 전쟁의 참상과 혹독한 노동 현실과 함께 안사와 훌라파의 사랑에 대한 갈망과 동료와의 연대, 희망, 타인에 대한 존중 등을 특유의 영화 어법으로 잘 녹여냈다.
81분이란 짧은 러닝타임에 풍성하고 깊이 있는 이야기를 담아냈다. 올해 칸 영화제에서 심사위원상을 받은 이 작품을 국제영화비평가연맹은 ‘올해 최고의 영화’, 미국 타임(TIME)지는 ‘올해 최고의 영화 1위’로 선정했다. 그렇게 꼽힐 만한 영화다.
영화 후반부에 안사의 외로움을 달래주고, 훌라파와의 감정도 이어주는 개 한 마리가 등장한다. 안사가 청소원으로 일하게 된 공장의 관리자가 주워온 유기견이다. 이 관리자는 벌써 그렇게 주변에서 주워 기르는 개가 6마리나 돼서 이 유기견을 안락사시킬 수밖에 없다고 하자, 안사가 얼른 집에 데리고 온다. 훌라파가 이름이 뭐냐고 묻자, 안사는 다정하게 개를 껴안으며 부른다. “채플린~”
송태형 문화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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