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의 예술 수도…마이애미 아트 페어

입력 2023-12-07 19:06   수정 2023-12-14 17:19


마이애미. 미국 플로리다주 동남쪽 끝자락에 있는 이 도시를 말할 때, 사람들은 대개 이런 이미지를 떠올린다. 끝없이 펼쳐진 해변과 내리쬐는 태양, 부자들의 초호화 별장, 미국 드라마(미드)의 세계화를 이끈 ‘CSI 과학수사대’의 도시….

여기에 하나 더 붙일 게 생겼다. ‘세계 예술 수도’. 적어도 12월엔 그렇다. 2002년 시작한 세계적인 아트페어 ‘아트바젤 마이애미 비치(ABMB)’ 때문만은 아니다. 이 기간 마이애미는 도시 전체가 예술 무대가 된다. 세계에서 가장 잘나가는 명품 브랜드와 갤러리 등 100여 곳이 모여 있는 ‘디자인 디스트릭트’를 중심으로 수십여 개의 갤러리가 저마다의 ‘쇼’를 펼친다. 매일 밤 음악과 영화와 미식이 함께하는 아트 이벤트가 열린다.

마이애미를 대표하는 루벨미술관, 드라크루즈 컬렉션, 페레즈, 마이애미현대미술관(ICA·Institute of Contemporary Art), 배스미술관 등은 수십 년 쌓은 내공으로 지금 이 시대에 가장 주목해야 할 작가들을 소개한다. ‘미국과 중남미를 잇는 관문’이란 지리적 특성이 낳은 다양성도 마이애미 예술의 자랑거리다.

‘친절’도 이 도시의 매력 포인트다. 날씨도, 사람도 그렇다. 마이애미데이드 카운티는 12월 내내 도심 어디든 갈 수 있는 무료 셔틀버스를 운영하고, 매주 목요일엔 무료 아트투어도 제공한다. 마이애미 해변의 12개 호텔을 연계한 아트페어도 12월 내내 열린다.

아트페어는 전 세계 어딘가에서 쉼 없이 열리지만, ‘엄마’ 역할을 하는 아트바젤 기간에 맞춰 ‘아들’뻘 아트페어 20여 개가 동시다발로 열리는 도시는 마이애미뿐이다. 이들이 내놓는 작품들은 유럽과 미국의 다른 지역, 아시아 국가들의 아트페어와는 결이 다르다. ‘길거리 예술’부터 회화, 조각, 가구 공예품에 이르기까지 분야도 다양하고, 중남미 아시아 아프리카 등 작가의 출신 지역도 서로 다르다.

장소도 그렇다. 어떤 페어는 강 위에서, 다른 축제는 모래사장에서, 또 다른 행사는 한적한 동네의 임시 텐트에서 열린다. 혹여 답답한 부스 안에 욱여넣은 그림들을 한참 지켜보다 지친다면? 페어장 문만 열면 끝없이 펼쳐진 마이애미 해변과 따뜻한 햇살이 기다린다. 마이애미 해변에서 차로 20분 거리인 디자인 디스트릭트로 넘어가면 파리와 밀라노 뺨치는 마이애미의 ‘럭셔리 바이브’도 느껴볼 수 있다. ‘12월의 예술 수도’로 떠나보자.
미술 '큰 손'들이 만든 유토피아…샹젤리제 거리가 부럽지 않네

● 마이애미 예술의 심장 '디자인 디스트릭트'

미국 마이애미는 오랜 세월 부자들의 휴양지였다. 1년 내내 따뜻한 날씨와 멋진 풍광 덕분이다. 엘비스 프레슬리, 실베스터 스탤론, 샤킬 오닐, 엘리자베스 테일러, 리어나도 디캐프리오, 저스틴 비버는 그래서 마이애미에 둥지를 틀었다.

이런 마이애미가 예술에 처음 눈을 뜬 건 10여 년 전이었다. 오랜 기간 예술인의 ‘뒷배’가 돼준 ‘큰손’ 컬렉터들이 연대해 작품을 마이애미시에 기증하고, 이걸로 미술관을 만든 게 시초였다. 부동산 개발회사 등 기업가와 디자이너, 예술가와 자선 사업가들이 힘을 모았다. 매년 6월 스위스 바젤에서 열리는 ‘아트바젤’을 2002년 마이애미로 들여온 뒤 이들과 함께 지역 아트페어를 만든 주역도 이들이었다.

마이애미의 변신을 얘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곳이 ‘디자인 디스트릭트’다. 마이애미 북쪽 해변과 국제공항의 중간쯤 되는 노스이스트 42번가에 자리잡은 이곳은 명품 쇼핑몰과 디자인 가구 쇼룸, 미술관과 레스토랑, 라이프 스타일 숍의 천국이다. 이 모든 점포를 걸어서 10분 안에 만날 수 있다.

이 거리를 만든 사람은 부동산 개발회사 다르카(Darca)의 창업자이자 최고경영자(CEO)인 크레이그 로빈스. 10년 전만 해도 우범지대였던 이곳엔 이제 경찰서 대신 에르메스 매장이, 술집 대신 갤러리가 들어서 있다.

마이애미를 ‘예술이 흐르는 매력 도시’로 만들기 위해 ICA 미술관 부지 등 금싸라기 땅을 기부하고 명품 브랜드들을 한데 모은 그에겐 “예술과 디자인에는 세상을 바꿀 힘이 있다”는 믿음이 있었다. 현재 이 구역에 들어선 패션 브랜드는 80여 곳. 여기에 디자인 숍과 가구 매장, 라이프 스타일 브랜드 등을 합치면 130여 개로 불어난다. 이들 숍과 숍 사이에는 13개 미술관·갤러리, 30여 개 레스토랑·카페가 자리잡고 있다.

의자 하나, 주차장 외벽도 예술

디자인 디스트릭트를 돌아보려면 노스이스트 38번가와 39번가 사이에 있는 ‘버키 돔’에서 시작하는 게 좋다. 미국의 건축가이자 발명가, 시인, 그리고 멘사의 두 번째 회장인 리처드 버크민스터(1895~1983)의 상징과도 같던 ‘돔’을 첨단 소재로 재탄생시킨 작품이다. 그 주변에 놓인 자그마한 의자와 테이블 하나하나가 디자이너와 건축가의 손이 닿은 작품이다.

지금 이 공간은 몽글몽글 거품이 피어오른 듯한 가구와 공공 설치 작품으로 채워져 있다. 디자인 디스트릭트로부터 디자인상을 받은 라라 보힌크의 ‘유토피아’ 시리즈다. 나무 위와 거리마다 코르크로 만든 그의 작품들이 설치됐다. 보도엔 사무엘 로스의 벤치 디자인도 놓였다. JR크로니클스가 마이애미에 사는 1048명의 모습을 촬영한 영상작품은 이 구역 정글플라자에서 매일 상영되고 있다.

ICA의 주차장은 꼭 챙겨봐야 할 ‘핫스폿’이지만 까딱하면 그냥 지나치고 만다. 800대를 주차할 수 있는 7층짜리 건물의 외벽이 캔버스여서다. 이 구역을 개발하던 초기 뉴욕 현대미술관(MoMA)에 의뢰해 여러 아티스트의 초현실주의 작품 등을 내걸었다.

루이비통·까르띠에도 참여

‘12월의 아트 마이애미’는 공공 프로젝트가 끌고, 민간이 미는 형태로 움직인다. 세계 최대 명품그룹인 루이비통모에헤네시(LVMH)는 아트위크 기간인 6일부터 5일간 아트갤러리 팝업 컬처하우스를 열어 크루즈 보글, 글레네이샤 해리스, 아멜리아 브릭스, 해롤드 카우디오 등의 작품을 전시한다.

까르띠에는 7일부터 22일까지 ‘타임 언리미티드’ 전시를 기획했다. 한정판 시계를 전시하고 브랜드 시계 제작 과정을 실감형 미디어로 보여주는 행사다. 리모와는 마이애미 아티스트 TYPOE와 협업해 이 구역에 영구 설치된 맞춤형 샹들리에를 제작했다.

12월은 마이애미 갤러리들엔 그동안 갈고 닦은 실력을 뽐낼 ‘기회의 시간’이다. 제프리 데이치 갤러리와 가고시안은 올해도 협업 전시를 한다. 벌써 여덟 번째다. 올해 주제는 ‘형태들(Forms)’. 오페라갤러리는 얼마 전 작고한 보테로의 전시를 기획했다.

이런 파티에 미식이 빠질 수 없다. 디자인 디스트릭트를 둘러보면 뉴욕에서 미쉐린 스타 레스토랑이 된 한국식 스테이크 하우스 ‘꽃(cote)’ 간판이 보인다. 아트위크 때 맛깔나는 음식과 함께 큰손들이 자신의 컬렉션을 소개하는 ‘아트 애프터 다크’(1인 900달러) 프로그램을 만날 수 있다.
손에 닿을 듯한 빛의 폭포…오감 자극하는 미디어아트

● 세계 최고 몰입형 전시 '수퍼블루'

미국 마이애미 공항에서 차로 15분 떨어진 노스웨스트 23번가. 주택가와 그라피티로 가득 채워진 골목을 지나면 세계 최고 현대미술 컬렉션을 보유하고 있는, 마이애미의 슈퍼 컬렉터이자 자선사업가 루벨 부부의 미술관이 나온다.

2021년 5월, 이 미술관 건너편에 또 하나의 랜드마크가 들어섰다. 63년 역사를 자랑하는 뉴욕 기반의 세계적인 갤러리 페이스가 세운 첫 몰입형 전시장 ‘슈퍼블루’다. 5만㎡(약 1만5000평)의 옛 공장부지를 개조한 이곳은 페이스갤러리가 세계 최고의 몰입형 전시 기획사인 일본 창작집단 팀랩에 투자하면서 더욱 화제가 됐다.

지난 4일 찾은 슈퍼블루는 첫인상부터 강렬했다. 외벽 전체를 JR 크로니클스의 ‘마이애미 벽화’로 뒤덮었기 때문이다. JR은 그라피티 작가로 시작해 도시 곳곳마다 대형 사진을 벽화로 거는 사진가이자 행위예술가다.

이달 초 시작된 ‘2023 마이애미 아트위크’ 기간을 맞아 슈퍼블루는 JR이 마이애미에서 몇 달간 촬영한 주민 1048명의 모습으로 외벽을 채웠다. 그는 이 작품을 위해 지난해 ‘사진관 트럭’을 몰고 마이애미 곳곳을 훑었다. 어린아이부터 노인까지 다양한 직업과 계층의 사람을 카메라에 담았다.

슈퍼블루 안에는 시각 청각 촉각 후각 등 모든 감각을 일으켜 세우는 작품들로 가득하다. 팀랩의 몰입형 예술 작품 중엔 ‘조각과 삶 사이의 질량 없는 구름’이 가장 파격적이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방수복을 입고 들어가면, 순식간에 바닥부터 천장까지 구름으로 가득 찬다. 10분여간 이어지는 특별한 경험은 ‘구름 위를 걷는 느낌’과 ‘구름 속으로 사라지는 공포’를 동시에 느끼게 해준다.

슈퍼블루 전시의 하이라이트이자 마지막 작품은 영국 런던 기반의 미디어 아티스트이자 무대예술가, 에스 데블린의 ‘우리의 숲(Forest of Us)’이다. 기관지에서 폐로 이어지는 우리의 몸, 나무가 탄소를 교환하는 방식에서 시각적 대칭을 찾아내는 짧은 영화가 끝나면 스크린이 활짝 열리며 거울의 미로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어디가 어디인지 분간하기도 어렵고, 땅과 하늘의 경계마저 사라진 공간에서 사람들은 길을 잃는다. 그 혼돈 속에서 탈출구를 찾아 헤매는 사람들의 모습이 사방에 비친다. 환경 문제에 관심이 많은 이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 관람객에게 환경 문제를 돌아보라고 당부한 것 같다.
74개 TV모니터 이어붙여 'MIAMI' 상징 만든 백남준…영원한 동심을 꿈꾸다

백남준의 명작 되살린 '배스 미술관'

1990년. 미국 플로리다주 마이애미 공항으로 입국하는 사람들이 처음 마주한 건 백남준의 작품이었다. TV를 길게 연결해 비행기 날개로 만든 ‘TV윙’. 그 옆엔 74개 TV모니터로 연결한 도시의 이름, ‘MIAMI’가 나란히 자리했다. 10년도 안 돼 작품은 수명을 다하거나 훼손돼 사라졌지만, 마이애미 사람 중 일부는 지금도 도시의 상징으로 기억한다. 한국에도 잘 알려지지 않은 이 공공미술 프로젝트와 그의 유작들이 지금 주요 비영리 미술관 중 하나인 배스미술관에서 재조명되고 있다. 지난 10월 개막해 내년 8월 16일까지 열리는 ‘백남준: 마이애미 시절’을 통해서다.

백남준은 마이애미를 사랑했다. 1960~1970년대 뉴욕을 기반으로 세계 곳곳을 다녔던 그는 1980년대 마이애미 해변가의 작은 아파트를 산 뒤, 도시생활에 지칠 때마다 이곳을 찾았다. 일종의 휴식처이자 창의적 영감을 주는 품이었던 셈이다. 1996년 뇌졸중으로 왼쪽이 마비된 이후 그는 마이애미 해변 콘도에 살며 여생을 보냈다.


전시의 시작은 그가 마이애미에 살면서 제작한 ‘TV첼로’(2003)다. 3개의 TV를 쌓아 만든 작품 속엔 그의 뮤즈였던 첼리스트 샬럿 무어만의 영상이 흐른다. 제임스 부르히 배스미술관 큐레이터는 “그는 뇌졸중으로 쓰러지기 전이나 후나 멈추는 법 없이, 늘 그 순간을 사는 예술가였다”고 말했다. 몸을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없었던 그는 말년에 붓을 들고 자신의 작품에 드로잉을 남겼다. 이 작품에도 그가 새긴 이름들이 보인다. 한쪽엔 붉은 글씨로 ‘白바보’라고 썼고, 다른 작품 위에 ‘PAIK 쥬ㄴ’이라고 남겼다. 백남준의 로봇 조각인 ‘LUCY’(1992)와 ‘인공 플라스틱 로봇’(2002)도 동시에 전시됐다.

전시의 하이라이트는 그의 마이애미 공항 작품의 기록들이다. 백남준의 삶과 마이애미에서의 작품에 대한 기록이 많이 남아 있지 않아 미술관은 그 일대의 공공 도서관, 지역 기록 보관소, 신문 기사 등을 꼼꼼히 찾아 모았다. 1985년 마이애미 정부가 의뢰한 이 프로젝트는 제작하는 데만 5년 걸렸고, 1990년부터 약 8년간 공항에서 자리를 지켰다. 배스미술관 관계자는 “백남준은 1982년부터 2003년까지 남부 플로리다에서 공개 프레젠테이션을 약 10회 했고, 마이애미 웨이브 필름페스티벌과 주요 아트 페스티벌에 초대받아 작품을 발표했다”며 “마지막 날까지 쉬지 않고 새로운 창작에 몰두했다”고 말했다.

뇌졸중 직후 회복에 안간힘을 쓰던 1998~1999년 아크릴 물감으로 캔버스에 그린 세 점의 ‘무제’ 작품에는 그의 간절함이 담겨 있다. 그 그림 옆엔 1990년의 ‘건강한 백남준’ 사진(브라이언 스미스의 작품)이 벽면을 가득 채웠다. TV를 머리에 쓴 채 환하게 웃고 있는 그의 모습 뒤로 마이애미의 야자수가 꼿꼿하게 서 있다. 전시는 내년 8월 16일까지.

마이애미=김보라 기자 destinybr@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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