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자료는 두 가지 점에서 이목을 끌었다. ‘우선 심사 조항’이라는 특이한 규정이 존재했었다는 것과 이걸 없앤 배경이 무엇일까에 시선이 집중됐다. 보도 자료에 자세한 설명은 없었지만, KT&G 측에 문의한 결과, 내용은 이랬다. ‘현직 사장이 연임 의사를 밝힐 경우 다른 후보자에 우선하여 심사한다’는 것이다. ‘연임 우선제’다.
청와대가 실제 외압을 행사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2018년 3월 주총 당시 2대 주주인 IBK기업은행은 백 사장의 연임 안건에 반대표를 던졌다. 1대 주주인 국민연금마저 중립 의사를 밝히면서 백 사장의 운명은 외국계 펀드의 손에 맡겨졌다. 글로벌 의결권 자문사인 ISS와 국내 의결권 자문사인 한국기업지배구조원 등이 경영진 편에 서면서 결과는 백 사장의 연임으로 종결됐다.
KT&G 이사회가 ‘우선 심사’를 실제 적용한 건 2021년 연임 때다. KT&G는 이듬해인 2022년 아예 이사회 규정으로 연임 우선제를 못박았다. 3년 전 외압 의혹이 불거진 탓에 KT&G 이사회는 어떤 외압도 없이 백 사장의 3 연임 안건을 이사회에 상정했다.
당시 백 사장은 국내외 주주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아 세 번째 임기를 시작할 수 있었다. 백 사장 단독 입후보로 진행된 터라 사장 후보를 정하고, 이사회에서 최종 선임하기까지 걸린 시간은 단 11일(영업일 기준)이었다.
KT&G의 사장 후보 검증 과정은 ‘지배구조위원회-사장후보추천위원회-이사회’의 3단계로 진행될 예정이다. KT&G 관계자는 “지배구조위원회 및 사장후보추천위원회 위원은 전원 경영진으로부터 독립적인 사외이사로 구성될 것”이라고 말했다.
KT&G가 자발적인 조치라고 설명하긴 했지만, 이번 이사회 규정 개정은 플래시라이트캐피탈매니지먼트(FCP)라는 행동주의 펀드의 공세와 무관치 않다. FCP는 이달 1일 KT&G 이사회 의장 앞으로 사장 후보 선임 절차를 개선해달라는 내용의 서한을 발송하고, 이를 7일 보도자료로 만들어 언론에 배포했다. 이사회 규정을 개정했다는 KT&G 측 보도자료는 FCP 발표 하루 뒤에 나왔다.
FCP가 이사회에 요구한 것은 크게 두 가지다. 사장 후보를 검증할 수 있는 “상식적으로 말이 되는 시간을 확보하라”는 것이 첫 번째다. KT는 최근 대표이사 후보 선임에 4개월
(2023년 4월 ? 8월), 2018년 포스코는 2개월 동안 (2018년 4월 ? 6월) 절차를 진행한 바 있다. 11 영업일 만에 사장을 선임한 KT&G는 다른 소유 분산 기업과 비교해도 절차가 지나치게 간소하다는 지적이다.
이와 함께 이상현 FCP 대표는 “2018년 연임 당시 후보 자격을 ‘전, 현직 전무 및 계열사 사장 이상’으로 한정한 것을 이번에 없앰으로써 공정성 논란을 불식시켜야 한다”며 “내부 인사를 사장으로 선출하더라도 실력 위주의 후보가 나올 수 있도록 해야 하며, 외부 인사에도 공정하게 기회를 줘야 한다”고 주장했다.
12일 현재 KT&G의 최대 주주는 IBK기업은행이다. 국민연금은 올 3월 주주총회에서 의결권 수탁위원회를 통해 현 경영진에 손을 들어준 뒤 1%에 육박하는 KT&G 지분을 처분하는 등 앞뒤가 맞지 않는 행보를 보인 끝에 3대 주주로 내려앉았다. 2대 주주는 외국계 뮤추얼 펀드다.
이와 관련, 최근 국민연금은 기금운용본부 내에 지배구조 개선을 위한 위원회를 설립했다. 기금운용위원회 산하 수탁자책임전문위원회의 상위 기구로서 기금운용본부가 소유분산기업에 대해 직접 의결권을 행사하겠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김규식 기업지배구조포럼 회장은 “소유 분산 기업의 지배구조를 개선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KT&G는 KT, 포스코, 시중 대형 은행들처럼 외부에도 문호를 개방하는 방식으로 투명한 사장 선임 절차를 만들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박동휘 기자 donghuip@hankyung.com
관련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