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관계는 이념적 대립의 산물이기 때문에 원래 적대적 성격을 띠기 쉽다. 반면 국내 정치에서는 정책의 차이가 크지 않기 때문에 반드시 적대적일 필요는 없다. 하지만 국내 정치인들은 대부분의 정치적 쟁점에 관해 적대적인 대치 전선을 형성하면서 자기편을 결집시키려고 한다. 그 근원을 조금 멀리서 탐구해본다면 에릭 프롬의 <자유로부터의 도피>에서 찾을 수 있다. 프롬은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인들이 히틀러에게 전권을 부여하면서 나치즘의 기반을 마련해 준 원인을 탐구했다.
위기 상황에서 사람들은 모든 쟁점에 관해 자신만의 견해를 갖기 어렵다. 가장 쉬운 방법은 그 쟁점에 관해 내 편이 어떤 견해를 가졌는지 알아내는 것이다. 그리고 무조건 그 견해를 지지하고 상대편 견해를 비난하면 된다. 내 편의 사람들은 내 편의 논리를 합리화할 수 있는 매우 간단한 논리로 무장하고 있다. 그저 따라가기만 하면 된다. 그 정도만으로도 지식인 행세를 할 수 있다. 히틀러가 경제 위기의 원인을 유대인과 공산주의자에게서 찾았듯이, 우리나라 정치인들도 모든 위기의 원인이 상대편에게 있다는 논리를 곧잘 만들어낸다.
원래 정치는 가능성의 예술이라고 한다. 하지만 요즘 정치에서는 유연한 가능성보다 경직된 논리가 판을 친다. 상황을 이와 같이 몰아가는 데에는 법률가들이 큰 역할을 담당한다. 법률가는 정의와 불법의 이분법을 즐긴다. 적당한 논리를 가미해서 내 편이 정의롭고, 상대편은 불법이라고 주장하면 끝난다. 참 쉬운 일이다. 중세시대와 달리 근대에는 종교를 정치 영역에서 분리한 것처럼, 이제 현대에 법학을 정치 영역에서 분리할 필요는 없을까? 법치주의 사회에서 매우 위험한 생각이라고 비난할 수도 있다. 하지만 법률가들이 정치의 영역에서 이분법을 구사하는 현 상황보다 더 위험하지는 않을 것이다.
어려울수록 기본에 충실할 필요가 있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민주주의의 기본을 지키면 된다. 민주주의의 기본은 다수결이지만, 다수결은 소수의 존중과 약자의 보호를 전제로 한다. 민주주의는 상대편에 대한 인정을 토대로 성립한다. 다른 말로 하면 공존 또는 공존주의(共存主義)를 기초로 하는 것이다. 공존주의 원칙 아래 상대편의 존재를 인정하기만 하면 어떤 의견도 허용된다. 하지만 상대편을 부정하면 내 편의 존립 기반도 위험해진다. 적대적 공존이 아니라 그냥 공존(共存)을 기본으로 하는 사회를 만들면 안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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