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렵게 예약해 방문한 대학병원 외래도, 스스로 골라 찾아갈 수 있는 개인 의원도 아니기에 다급하게 찾아와 속절없이 자기 민낯을 내보여야만 하는 곳. 그곳은 바로 응급실이다.
그중에서도 아픈 아기를 안고 새벽에 응급실에 뛰어 들어오는 엄마들의 머리는 이리저리 삐죽 튀어나오게 질끈 묶고 옷에는 아이 구토나 우유 등이 묻어있기 십상이다. 이런 모습을 하루에도 몇 차례나 마주하는 소아응급센터 전문의 이주영 교수는 그들의 밤이 얼마나 고단함으로 가득 차 있는지를 누구보다 이해하는 엄마다. 그 또한 뜻대로 되지 않는 육아에 숱한 밤을 누구보다 자책하고 좌절한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이 교수는 매일 소아응급실에서 마주하는 찰나의 기쁨과 감사의 순간들, 안타까운 사연들, 소아청소년과 의사로 살아가며 겪는 수많은 아픔과 슬픔, 그로 인한 성장의 시간을 오래 기억하기 위해 퇴근길이면 당직 일지를 쓰기 시작했다.
소아청소년과 응급실이 붕괴하고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소아청소년과를 지원하는 전공의가 사라지고, 동네 소아청소년과가 문을 닫고, 소아응급실이 더 이상 중환자를 받지 못하는 현실에 직면했다.
이 교수는 "소중한 이 땅의 아이들을 지키기 위해 아픈 현실을 용기 내어 수면 위로 끌어올리고, 어른들의 역할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싶었다"며 자신의 당직일지를 에세이로 펴낸 이유를 밝혔다.
신간 '우리는 다시 먼바다로 나갈 수 있을까(오늘산책)'에는 이 교수가 아이 돌보는 법이 서툰 초보 부모들과 마찬가지로 똑같이 서툴렀던 자신의 초년병 시절이 담겼다. 딸의 팔이 조각조각 부러져 의사가 아닌 보호자로서 응급실을 찾았을 때는 상대의 입장과 속도를 몰라 상상하기 힘든 고통을 겪기도 했다고.
당직일지 속 그날그날의 응급실에는 아이를 잃어 절망과 고통을 겪고 있는 부모들의 아픔과 보이지 않는 곳에서 최선을 다해 환자를 돌보는 병원 곳곳의 ‘무대 뒤’ 의사들, 매일 밤 잠든 아이와 가족을 위해 귀하디귀한 마음 한 조각을 기꺼이 떼어주는 간호사들을 향한 따스한 시선도 담겼다.
소아청소년과 전문의를 지원하는 전공의들이 사라지고 있다. 정확히 5년째, 간격이 고른 계단처럼 착착 줄어드는 전공의 숫자는 똑같은 숫자로 착착 줄어드는 소아청소년과 전문의의 예고편이다. 아이의 혈색, 숨소리, 목소리 하나로도 위험을 잡아낼 수 있도록 수년에 걸쳐 이미 충분히 훈련된 전문의들마저 소아청소년과 진료 현장을 떠난다.
저자는 "드라마 속 따뜻한 마음을 가진 ‘슬기로운 의사’들은 대한민국 어디에도 없다고 환자들은 호소하지만, 사실 그들 모두 현실의 말과 행동으로 병원 구석구석에 숨어 있다"면서 "부디 현실 감각 없는 소아청소년과 마니아들이, 쓸데없이 공명심 넘치는 흉부외과 마니아들이, 태아의 심장 소리만 들어도 좋아 죽는 산부인과 마니아들이, 프라모델 오타쿠처럼 작은 장기와 선천성 기형에 집착하는 소아외과 마니아들이 이 땅에서 사라지지 않기를 바란다"고 소망했다.
한편 책의 인세는 발달장애 청년들의 자립을 돕기 위해 푸르메 재단에 전액 기부된다.
이미나 한경닷컴 기자 helper@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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