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은 현실을 기록하는 기술, 사진을 찍는 사람은 기술자. 198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사진에 대한 한국 사회의 통념은 이랬다. 하지만 독일 유학을 갓 마치고 돌아온 젊은 시절의 구본창(70)은 생각이 달랐다. 사진도 예술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그는 인화지에 바느질하고, 필름을 태우는 등 파격적인 기법의 작품을 꾸준히 선보였다. “이게 무슨 사진이냐” “사진계를 망친다”는 비판이 쏟아졌지만, 오늘날 한국에서 사진이 엄연한 현대예술의 한 장르로 대우받는 데 그의 이런 기여가 큰 역할을 했다. 구본창이라는 이름에 ‘한국 현대사진의 개척자’란 별명이 따라붙는 이유다.
구 작가는 ‘한국의 전통을 가장 아름답게 표현한 작가’로도 불린다. ‘탈바가지’나 싸구려 관광상품쯤으로 무시당하던 전통 탈의 예술성을 ‘탈’ 연작(1998년 시작)으로 재조명한 것도, 백자 사진 연작(2004년 시작)으로 고려청자에 가려져 있던 조선 백자의 매력을 국내외에 널리 알린 것도 그다. 그만큼 구 작가가 한국 사진 역사에서 차지하는 존재감은 거대하다. 서울시립미술관이 그의 개인전 ‘구본창의 항해’에 국내 작가 개인전 역사상 최대 규모인 1, 2층을 모두 할애한 것은 이 때문이다.
전시는 작품 500여 점, 관련 자료 600여 점에 달하는 방대한 규모의 ‘재료’로 구 작가의 삶과 작품세계를 순서대로 재구성했다. 전시장 초입에서는 청소년기 사진 습작과 어린 시절 수집품 등을 만날 수 있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남해의 한 해안가에서 찍은 자신의 뒷모습 ‘자화상’(1972). 전시 제목처럼 ‘예술이라는 항해’를 떠나기 전 각오를 다지는 듯한 모습이다. 구 작가는 “당시의 나는 내성적인 모범생이었지만, 언젠가는 저 바다 너머 세상으로 항해를 떠나고야 말겠다고 생각했다”며 “그런 각오를 담기 위해 친구에게 부탁해 찍은 사진”이라고 했다.
7년 뒤인 1979년, 연세대 경영학과를 나와 대우실업에 다니던 구 작가는 6개월 만에 사표를 내고 그때의 다짐처럼 독일 함부르크 조형미술대로 훌쩍 유학을 떠났다. 이 시기 대표적인 작품은 어머니의 죽음, 이방인으로서의 소외감 등 개인사를 담은 ‘일 분간의 독백’. “네 사진은 유럽인이 찍은 사진 같다. 한국 유학생인 너만의 이야기를 해라.” 평소 존경하던 사진가 안드레 겔프케가 해준 조언을 따라 찍은 작품이다. 1990년대 들어 바느질로 이어 붙인 종이에 이미지를 인화한 ‘태초에’ 연작, 한지에 곤충 이미지를 표본처럼 인화한 ‘굿바이 파라다이스’ 연작 등 실험적 작품들이 뒤를 잇는다.
실험 사진에 천착하던 그가 정적이고 서정적인 작품을 찍기 시작한 것은 1996년 아버지를 떠나보낸 뒤부터다. 아버지의 임종 사진인 ‘숨’을 시작으로 전시장에서는 일반 관객에게도 잘 알려진 작품들이 이어진다. 1층 전시장 마지막 부분의 거대한 달항아리 사진 연작 ‘문 라이징 Ⅲ’, 2층의 ‘백자’ 연작, 황금 유물, 전통 탈 연작 등이 대표적이다.
‘콘크리트 광화문’ 연작(사진)은 특히 눈여겨볼 만한 수작이다. 6·25전쟁으로 파괴된 광화문을 신속히 복원하기 위해 임시로 제작됐다가 지금은 해체돼 보관 중인 ‘조립식 광화문 부품’을 통해 한국의 근현대사를 압축적으로 표현했다.
전시 앞부분의 밀도가 다소 낮아 관람객의 집중력을 흩트리는 점은 아쉬운 대목이다. 작가가 유년기에 수집한 잡지 등 소품들을 별도로 모아놓은 장소가 그렇다. 하지만 이 물건들과 전시 공간 역시 ‘작가 구본창’을 보여주는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하면 이해할 수 있다. 구 작가는 “어린 시절부터 낡은 물건을 잘 버리지 못하고 애지중지했다”며 “백자를 비롯해 오래된 물건, 버려진 물건들을 주로 찍는 것도 손때와 흔적이 모여 역사를 만든다고 믿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내년 3월 10일까지 열리며 입장료는 무료다.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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