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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연합(EU) 회원국들이 2년 동안 끌어온 재정 준칙 개편 작업을 마무리했다. 부채 감축 강도를 놓고 대립해 온 경제 대국 독일과 프랑스가 가까스로 합의점을 찾으면서다.
20일(현지시간) 유로뉴스 등에 따르면 크리스티안 린드너 독일 재무장관과 브루노 르메르 프랑스 재무장관은 전날 저녁 늦게 파리에서 만나 재정 준칙 관련 타협안을 찾았다고 발표했다.
르메르 장관은 “1년 전 우리의 입장은 근본적으로 달랐지만, 이탈리아를 포함한 회원국들의 지원 아래 계속해서 노력해 온 결과 합의점에 다다를 수 있었다”고 말했다. 린드너 장관은 “준칙이 충분히 엄격하지 않았다면 동의하지 않았을 것”이라며 “새 준칙은 (각국의) 부채 수준을 낮추고 적자를 줄이기 위한, 신뢰할 만하고 효율적인 길을 제시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최대 경제국인 두 나라 간 합의에 따라 27개 EU 회원국들은 이날 화상 회의에서 재정 준칙 초안을 확정했다. 이는 내년 6월 유럽의회 선거 전까지 의회의 승인을 얻어야 법적 효력을 갖게 된다. 이미 각국 정부가 기존 준칙에 기반해 내년 예산안을 짜둔 상태여서 실제 적용 시점은 2025년이 될 전망이다.
‘안정?성장 협약’(Stability and Growth Pact)이라 불리는 EU의 재정 준칙은 1990년대 후반 처음 만들어졌다. 그리스 재정 위기를 계기로 체결된 마스트리히트 조약에서 EU 회원국들은 연간 재정 적자와 부채비율이 국내총생산(GDP)의 3%, 60%를 초과해선 안 된다는 데 합의했다.
20년간 유지돼 오던 이 준칙은 코로나19 팬데믹(대유행) 기간 한시적으로 중단됐다. 그 결과 유로존(유로화 사용 20개국)의 GDP 대비 부채비율은 사상 최고 수준인 90%까지 높아졌다. EU가 2024년부터 준칙을 재가동하겠다는 방침을 공표하자, 기존 준칙을 현실에 맞게 손봐야 한다는 요구가 커졌다.
이에 EU 행정부 격인 집행위원회는 각국에 4년간의 부채 감축 계획 수립 기간을 부여하되, 개혁 등 경제 성장을 위한 조치가 수반될 경우 최대 7년까지 이를 연장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개편안을 마련했다.
이 개편안을 두고 보다 엄격한 준칙을 적용해야 한다는 독일과 더 많은 지출 여력을 보장해야 한다는 프랑스가 2년간 대립해 왔다. 타협안의 핵심 기조는 부채비율과 재정적자 관련 목표치는 유지하면서 각국에 재량을 부여한다는 것이다. 일례로 매년 5%포인트에 달했던 초과 부채 감축 비율은 국가별 상황에 따라 다르게 설정됐다. GDP 대비 부채비율이 90%를 넘는 국가는 매년 1%포인트씩, 60~90%인 국가는 0.5%포인트씩 줄여야 한다.
재정 적자 수준과 관련해서도 GDP 대비 비율이 1.5~3%인 국가들은 매년 1%포인트씩 이를 낮춰야 하며, 7년의 부채 감축 기간을 보장받은 경우 감축 규모는 0.25%포인트로 줄어들게 했다.
시그리드 카그 네덜란드 재무장관은 “국가별로 서로 다른 사정을 고려한 데다 투자 확대의 여지를 남겨 개혁을 장려하는 효과가 있다는 점에서 ‘지속가능한’ 부채 감축이 가능해질 것”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유럽 경기 침체가 1년 넘게 지속되고 있는 가운데 성장을 가로막는 수준의 엄격한 준칙을 적용할 필요는 없다는 데 공감대가 형성됐다는 설명이다.
일견 프랑스로 대표되는 남부 유럽 국가들의 승리라는 평가다. 프랑스, 이탈리아, 그리스, 스페인, 포르투갈, 벨기에 등 6개국의 GDP 대비 부채비율은 100%를 넘는다. 이들 국가는 청정에너지나 우크라이나 지원 등에 더 많은 예산을 쓰길 원한다.
그러나 독일을 필두로 한 네덜란드, 오스트리아, 스웨덴, 덴마크 등 북부 유럽 국가들이 수적 우세를 내세워 대부분의 요구 사항을 관철하는 데 성공했다는 시각도 있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회원국들의 독립성을 허용하긴 했지만, 독일과 같은 강경파가 제시한 엄격한 지출 한도 내에서만 가능하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고 짚었다.
장서우 기자 suwu@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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