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용 한국은행 총재가 22일 최수연 네이버 대표와 손을 잡았다. 금융·경제 분야 디지털 기술 협력을 확대하는 업무협약(MOU)을 맺으면서다. 이 총재가 체결한 MOU는 이번이 벌써 11번째다. 전임 이주열 총재(재임 8년간 14번) 때보다 외부와의 ‘접점 늘리기’에 훨씬 적극적이다. 이 총재는 작년 4월 취임할 때 ‘조용한 절간 같다’는 비아냥으로 세간에서 한은을 ‘한은사(寺)’로 부르는 걸 지적하며 “시끄러운 한은이 돼야 한다”고 했는데 이런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전임 총재 시절 한은의 MOU는 주로 중국 카타르 인도네시아 라오스 등 해외 중앙은행과의 협력에 집중됐다. 이에 비해 이 총재는 삼성 네이버 등 대기업과도 과감히 손을 잡고 있다.
이날 네이버와는 생성형 인공지능(AI) 하이퍼클로바X를 한은의 방대한 경제통계와 연계하기로 했다. 이 총재는 “네이버의 정보기술(IT) 기술력을 통해 한은의 정책·조사 역량을 한층 강화하고 대국민 서비스 품질을 향상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빅데이터, 사물인터넷, 클라우드 등 디지털 기술을 업무에 적용하는 방안도 모색한다.
한은은 지난 5월엔 삼성전자와 MOU를 맺었다. 한은이 개발하는 디지털화폐(CBDC)의 오프라인 사용을 모색하기 위해서다. 작년 11월에는 NH농협카드와 손잡고 신용카드 사용 정보를 통해 지역 경제를 분석하기로 했다.
정부 부처와의 MOU도 활발하다. 지난 19일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와 인구 정책을 공동 연구하는 MOU를 체결한 게 대표적이다. 한은은 이달 초 ‘초저출산 및 초고령 사회’ 보고서를 통해 육아 휴직, 도시로의 인구 집중 등 출산 기피 요인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수준으로 개선하고 집값을 2015년 정도로 낮추면 현재 0.7명대인 한국의 출산율을 1.6명대로 높일 수 있다고 제안했다.
한은은 금융감독원과는 비은행 예금취급기관의 금융정보를 공유하는 MOU를 맺었다. 은행에 집중된 한은의 정책 분석 범위를 넓히기 위해서다. 국회사무처 등 12개 기관과는 국가 전략·정책 빅데이터를 구축하기 위한 MOU를 맺었다.
이 밖에 인도네시아 중앙은행과 원화·루피아화 직거래, 이탈리아 중앙은행과 IT·지급결제 시스템 분야에서 협력하기로 했다.
이 총재 스스로도 외부와의 소통을 늘리고 있다. 금융통화위원의 향후 금리 전망 수준을 보여주는 ‘K점도표’를 공개해 시장과의 소통 방식을 개선했다. 향후 금리 수준에 대한 포워드 가이던스(선제 안내)도 시도했다. 한은 본연의 역할인 통화정책과 직접 연관이 없는 구조 개혁을 공개적으로 주문할 때도 많았다.
김두겸 울산시장, 강기정 광주시장, 홍준표 대구시장과 만나기도 했다. 경제 부총리, 금융위원장, 금감원장과의 모임(F4)에도 정기적으로 나간다. 이런 모임이 ‘한은의 독립성을 해친다’는 지적엔 오히려 “한은이 정부를 만나 정부에 영향을 준다는 생각은 안 하느냐”고 반문했다.
일각에선 한은 본연의 역할에 더 집중해야 한다는 비판도 있다. 이것저것 신경 쓰다 보면 법정 업무인 물가·금융 안정을 소홀히 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한은 관계자는 “MOU 대상 기관을 보면 한은이 그동안 연구한 주제와 연결된다”며 “일회성으로 보고서를 내는 데 그치지 않고 더 적극적으로 해결책을 모색해보자는 취지”라고 말했다.
강진규 기자 josep@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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