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레기서 아름다움 건져낸 '폐품 미술'의 대가

입력 2023-12-25 17:48   수정 2023-12-26 00:16


미술관 벽에 쓰레기들이 걸려 있다. 자전거 안장, 중국어로 쓴 책 ‘난초 그리는 법’ 같은 잡동사니다. 하나하나 작가가 직접 길거리에서 주운 쓰레기다. 그래서 작가는 이런 작품을 ‘(자신에 의해 새로운 가치가) 발견된 오브제’라고 부른다.

폐품을 모아 작품으로 탈바꿈하는 ‘아상블라주’ 작업의 대가 임충섭(82)의 ‘길바닥 예술’을 만날 수 있는 전시회가 문을 열었다. 서울 사간동 갤러리현대에서 열리고 있는 개인전 ‘획’에서다. 팔순이 넘은 노(老)작가가 자신만의 조형 세계를 구축한 1980년대부터 2003년까지의 작품 40점이 걸렸다. 자연과 문명처럼 서로 다른 개념을 하나로 잇는 작품, 그를 낳은 한국과 그를 작가로 품어준 미국을 주제로 한 작품이 주를 이룬다. 주제는 다양하지만 재료는 하나, 쓰레기다.

‘화석-풍경@다이얼로그’가 대표적이다. 그가 미국 뉴욕 거리에서 발견한 못, 지퍼, 전구, 휴지 조각을 상자 안에 넣고선 연극무대처럼 꾸몄다. 그는 어쩌다 쓰레기에 빠져들게 됐을까. “모든 물건마다 지내온 세월이 있으니, 나름의 역사가 있는 셈이죠. 이렇게 각각의 물건에 담긴 역사를 끄집어내고 하나로 엮어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내는 작업에 매력을 느꼈습니다.” 임충섭은 오브제 연작에 대해 “나와 마음이 통하는 물건을 길바닥에서 주워온 작품들”이라며 “조형미는 별것 아닌 물건에도 있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임충섭은 아상블라주뿐만 아니라 드로잉부터 설치미술, 사진, 음향까지 다양한 영역을 넘나들며 예술세계를 펼쳐 온 작가다. 재료부터 특이하다. 1층에 들어서면 만날 수 있는 작품 ‘흙’의 재료는 맨해튼에서 살던 시절 가져온 흙이다. 모래로는 자연을, 나무 조형물로는 도시 문명을 상징했다.

설치작품인 ‘길쌈’에는 한국과 서양의 전통을 함께 담았다. 바닥에선 올라오고 천장에선 내려오는 실이 나무 구조물과 서로 마주 보며 반대 방향으로 회전한다. 씨줄과 날줄을 한 올씩 엮어 천을 만들어내는 ‘베틀’ 구조를 쏙 빼닮았다. 이 작품이 놓인 바닥은 작가가 하와이 여행 때 찍은 ‘밝은 달’ 영상 차지다. 임충섭은 “한국의 전통 양식과 미국의 영상을 결합해 관객에게 동서양의 조화를 보여주려고 했다”고 말했다.

세종대왕과 한글을 상징하는 작품도 내놨다. 임충섭은 “몬드리안의 ‘기하학 콘셉트’는 600년 전에 한글이 먼저 보여줬다”며 “한민족이 가진 뛰어난 예술적 영감을 작품으로 녹여냈다”고 말했다. 그는 한글의 24개 자음과 모음을 캔버스 위에 흩뿌렸다. 캔버스 형태도 독특하다. 네모반듯한 캔버스를 직접 늘리고 깎아 둥그런 타원 형태로 만들었다. 바로 옆에는 한문으로 만든 작품을 나란히 배치했다. 두 문자의 조형적인 차이점을 관람객이 직접 느껴보도록 한 것이다.

그는 예술의 삶에 대해 “과학과 반대되는 인생”이란 정의를 내렸다. 정답이 있는 과학과 달리 예술엔 하나의 답이 없다는 이유에서다. 임충섭은 “예술은 워낙 복잡미묘하기 때문에 이론으로 다 표현할 수 없을 뿐 아니라 가끔은 (작가들이 멋있어 보이려고) 거짓말을 섞기도 한다”며 “이렇게 하나로 정형화할 수 없다는 것이 예술의 매력”이라고 했다. 그의 ‘매력있는 거짓말’은 2024년 1월 24일까지 전시된다.

최지희 기자 mymasaki@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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