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패권’을 둘러싼 미국과 중국의 긴장관계는 새해에도 계속될 것으로 예상된다. 미국은 최근 ‘첨단 반도체’에 이어 비교적 저사양인 ‘범용(레거시) 반도체’까지 중국을 규제할 가능성을 시사했다. 이 때문에 한국은 올해도 두 나라 사이의 파워게임에서 위태로운 외줄 타기를 이어갈 수밖에 없다. 지정(地政), 지경(地經)학적으로 중국과 미국의 영향을 동시에 받고 있는 데다 미·중 갈등의 정점에 있는 반도체산업 의존도까지 높아서다.
지난 12일 미국 코네티컷주 뉴헤이븐에 있는 예일대 연구실에서 폴 케네디 예일대 교수를 만났다.
▷미국이 중국에 대한 반도체 수출 제한을 확대하면서 한국도 중국과 외교적 긴장 관계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한국은 강대국 사이에 있습니다. 미국이 우방이긴 하나 한국으로선 중국 또한 경제적으로 굉장히 중요합니다. 무역 의존도가 높죠. 중국은 동시에 한국의 경쟁국이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중국은 언젠가 자동차 수출로 한국과 경쟁하게 될 것입니다. 한국 정부가 효과적인 다극 외교를 해야 할 시점입니다.”
▷2024년 미국 대선이 한국의 외교 노선에도 많은 영향을 미칠 듯합니다.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과 같은 미친 사람이 이끄는 미국 정부가 무척 걱정됩니다. 한국 정부도 많이 우려하고 있을 겁니다. (트럼프가 재선된다면) 중국과 동맹을 맺을까요? 러시아와 전쟁을 벌일까요? 그는 예측하기 힘든 인물입니다. 트럼프가 (외교 관계에서) 가장 큰 위험입니다. 그나마 조 바이든 행정부는 동아시아에서 (외교력으로) 존재감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대선 때까지) 인내심을 발휘해 희망을 갖는 것만이 최선의 정책입니다. 한국은 선택의 여지가 많지 않습니다. 미 대선에서 박빙의 승부가 펼쳐지고 트럼프의 재집권 가능성이 커지면 워싱턴DC에 취재차 모인 모든 외신과 언론들은 아마 겁에 질릴 겁니다.”
▷조 바이든 정부도 한국의 미국 투자를 압박하는 것은 마찬가지였습니다.
“아주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표를 얻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미국 제조업과 일자리 고용 창출에 자신들이 어떻게 도움이 됐는지 보여줘야 한다는 압박을 받고 있습니다. 그런 정책으로 공개적으로 비판받고 약간의 상처를 입더라도 정치인은 개의치 않습니다. 선거에서 승리만 하면 되죠.”
▷특히 반도체 부문에서의 미국 투자를 적극적으로 유도했습니다.
“미국이 반도체 생산 통제권을 상실했다고 경고하는 책이 많이 쏟아져 나왔죠. 중국 한국 대만 등 동아시아에서 집중적으로 생산하고 있습니다. 미국으로 반도체 생산 기지를 다시 가져오고 싶어 하는 겁니다. 고소득 일자리를 창출할 수 있죠. 그래서 미국 정부가 한국 기업에 관련 투자를 하라고 압력을 넣고 있습니다.”
▷미국 내 반도체 투자는 한국뿐 아니라 대만도 하고 있습니다.
“한국은 대만 TSMC가 어떻게 하고 있는지 잘 지켜봐야 합니다. 그들은 매우 영리하게 행동하고 있습니다. 미국에 반도체 생산 공장을 세울 것이라고 말하고는 상대적으로 사양이 낮은 제품을 미국 내에서 생산하려 할 것입니다. 더 정교한 칩 생산라인은 대만 현지에 남겨두고요.”(TSMC는 미국 애리조나주 공장 가동 시기를 숙련된 노동자 부족으로 2025년으로 1년 늦춘다고 발표했다.)
▷투자 유치에 관한 한 미국 정치권의 결집력은 대단한 것 같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이전 미국은 레세페르(laissez faire·자유방임주의), 자유무역주의에 대한 자부심이 있었습니다. 중앙정부의 권위도 약한 편이었죠. 하지만 전쟁 때 완전히 바뀌었어요. 1942년 2월 미국의 모든 자동차 회사는 정부로부터 개인 차량 생산 금지 통보를 받았습니다. 모든 공장은 전쟁에 쓰일 트럭이나 장교용 차량, 탱크 등을 생산하는 군수공장으로 전환했습니다. 이 같은 생산력이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습니다.”
'강대국의 흥망' 저자…"경제력 없는 군사력은 모래 위 성"
그는 이 밖에 <제국을 설계한 사람들> <21세기 준비> 등 다른 저서도 내놨다. <제국을 설계한 사람들>은 1942년 말부터 1944년 여름까지의 2차 세계대전 중반기를 집중 조명했다. 전쟁 승리의 요인을 분석하면서 과학자, 기술자 등 개인과 조직의 전략이 어떻게 실행됐는지를 꼼꼼히 짚었다.
1945년 영국에서 태어난 케네디 교수는 인터뷰에서 자신이 2차 세계대전과 해전에 관심이 생긴 것은 어린 시절의 가정환경 영향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영국 북동부의 조선소 마을에서 자랐는데 삼촌과 아버지 모두 대형 군함을 건조했다”며 “자연스럽게 역사와 전쟁 군함에 관한 책에 빠지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영국 뉴캐슬대를 졸업한 뒤 옥스퍼드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 1983년 예일대 역사학 교수로 임용됐다.
뉴욕=박신영 특파원 nyusos@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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