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치콕이 누구야”
지난달 27일, 국회로 첫 출근한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의 발언을 메모하던 2·30대 기자들은 당황했다. 비대위원 대상자의 나이를 언급하며 "이창호 사범은 10대에 세계를 제패했고, 조지 포먼은 제 나이 때 헤비급 챔피언 했다. 히치콕 감독은 60살 때 '사이코'를 만들었다. 열정과 동료 시민에게 봉사하겠다는 선의에는 나이 제한이 없다"고 답한 것에 대해서다.
모두 MZ(밀레니얼+Z)세대에게는 생소한 인물들이다. 모두 1990년대 대중문화에 익숙한 X세대에게 유명한 인물들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한 위원장에 대해 단순히 나이를 넘어 X세대 문화와 취향을 본격적으로 정치권에 이식하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이는 ‘영라이트(young right)’로서의 정체성을 보여주며 여권의 외연을 확장하는 효과를 낳고 있다는 분석이다.
조지 포먼은 1994년, 복서로는 환갑의 나이인 45세의 나이로 WBC챔피언에 올랐다. 훌륭한 복싱 선수지만 무하마드 알리나 타이슨 등 ‘역대급’ 인물은 아니다. 다만 챔피언에 올랐을 때 나이가 화제가 되며 당시 대학생과 청소년기를 보낸 X세대에게는 깊은 인상으로 남아 있다.
MZ세대 기자들에게 곤혹감을 안겼던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은 다른 세대와 비교해 X세대에 특히 유명한 인물이다. 1990년대는 ‘키노’ 등 영화잡지가 인기를 끌며 유명 거장들과 그들의 작품이 대중에게 소개된 시기다. ‘출발, 비디오여행’ 등 영화 관련 TV프로그램이 여기에 불을 붙이며 히치콕 등 개성 있는 고전 감독들의 이름이 한창 영화에 관심이 많던 1970년대생들에게 널리 알려졌다. 이전 비디오 대여점과 비교해 고전 영화를 많이 취급하던 체인 ‘영화마을’이 전국 각지에 생기며 히치콕의 작품을 직접 볼 기회도 이전보다 많았다. 1950~60년대에 주로 활동한 히치콕의 영화를 X세대들이 가장 많이 아는 이유다.
지난달 29일 비상대책위 첫 회의에서 한 발을 붙인채 다른 발을 움직여 상대를 속이는 농구의 ‘피벗’ 기술을 예로 들어 향후 활동 방향을 이야기한 것도 전형적인 ‘X세대적 언사’다. 당시 한 위원장은 “우린 이기기 위해서 모였지만, 그 과정에서 할 수 있는 모든 전략을 다 동원하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발은 반드시 공공선이라는 그리고 공동의 선이라는 명분과 원칙에서 떼지 않겠다는 원칙, 피벗 플레이를 하겠다는 약속을 드린다”고 말했다.
농구는 만화 ‘슬램덩크’와 드라마 ‘마지막 승부’에 더해 마이클 조던이 인기를 끌었던 1990년대에 가장 인기가 높았던 스포츠다. 농구에 대한 인기는 2002년 월드컵과 함께 축구로 옮겨갔다. 피벗과 같은 농구 용어를 동원해 정치적 행보를 설명할 정치인은 1970년대생이 아니면 나오기 힘들다는 분석이 나오는 이유다.
정치에 뛰어들며 서태지와 아이들의 ‘환상 속의 그대’ 가사를 인용한 것도 X세대로서의 정체성이 아니면 불가능하다는 평가다.
한 정치권 인사는 “초임 검사 때부터 개인 방을 배정 받아 독립적으로 수사하는 검찰의 문화 덕분에 개성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 같다”며 “술을 마시지 않고 개인적인 취미를 즐기는 삶도 X세대 감성에 도움을 줬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는 정치적으로 전통적인 민주당 지지층을 돌려세우는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정치적 선택에는 이성 이상으로 감성이 작용하는 가운데 한 위원장의 발언이 40대에 동료의식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것이다. 권위주의 보수에 대한 40대의 거부감이 한 위원장의 수사를 통해 희석될 수 있다는 설명이 나온다. 한 여권 관계자는 “한 위원장 취임 이후 40대를 중심으로 당에 대한 이미지가 개선되고 있다는 내부 관측이 나오고 있다”고 전했다.
한 위원장의 ‘취향’은 X세대 이후부터 소비되는 상품에서 더 큰 파급력을 갖는다. 그가 즐기는 것으로 유명한 제로콜라, 바나나맛 단지 우유 등은 X세대부터 본격 소비되기 시작했지만 이후 세대들도 좋아하는 상품이다. 한 정치권 인사는 “세대별 구분이 이전의 정치권의 문법이었다면 한 장관은 2030세대와도 가깝다는 것을 이미지적으로 보여주고 있다”며 “세대론이 아닌 세대공감에 호소하고 있다는 점이 특징”이라고 했다.
이같은 문화적 코드는 직설적인 한 장관의 화법과 더해져 새로운 보수의 이미지를 낳는다. 엄 소장은 “영 라이트(Young right·젊은 보수)와 올드 레프트(Old left·기성 진보) 대비 효과를 이 같은 인용으로 극대화한다“고 평했다. 메시지 관리에 능통한 한 당 관계자는 “야권의 주축인 86 운동권(80년대 학번·60년대생)과의 차별성을 부각하려는 의도도 있는 것 같다”면서 “과거에는 보수와 진보가 진영에 따른 이야기를 했다며 한 위원장은 쟁취해 문화를 향유하는 보수와 그렇지 못한 운동권을 대비시키는 전략”이라고 분석했다.
박주연 기자 grumpy_cat@hankyung.com
관련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