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일훈 칼럼] '오너들의 반란'은 끝났지만

입력 2024-01-04 17:43   수정 2024-01-05 00:26

지난해 재계 인사의 특징은 세대교체만으로 설명할 수 없다. ‘오너들의 귀환’ 내지는 ‘오너들의 반란’이라고 평가하는 것이 타당하다. 산업계와 금융계에 제법 이름난 장수 최고경영자(CEO)들이 대거 물러났다. 최태원 SK 회장은 부회장단을 대표이사에서 물러나게 한 뒤 사촌 동생(최창원)을 그룹 2인자로 끌어올렸다. 박현주 미래에셋 회장은 주력 회사 CEO들을 50대 중반으로 꾸리면서 친정 체제를 강화했다. 한화 HD현대 코오롱 등은 2, 3세들이 부회장급으로 전면에 나섰다. 롯데는 3세를 그룹 미래전략실장으로 임명했다. 삼성은 ‘전쟁 중에 장수를 교체하지 않는다’는 원칙에 따라 사장단 교체는 최소화하면서도 부사장급을 대거 정리했다. 고위 중역들의 퇴임 안전판인 상근 고문제도 폐지했다.

오너들의 전면적 부상은 지난해 경영 실적이 저조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미래 생존에 대한 위기의식의 발로다. 총수들은 기업 존속에 무한 책임을 진다. 회사 운영을 위해 엄청난 규모의 개인 빚을 감수하는 것도 그들이다. 자신과 기업을 동일시하며 생사를 함께하는 운명체라고 여긴다. 비록 늦어버리긴 했지만, 오죽하면 90세의 윤세영 회장이 태영그룹 경영일선에 복귀했겠나. 기존 지식과 경험이 먹히지 않는 시대가 오면 사람부터 흔드는 게 상례다. 사람을 바꾸지 않으면 타성과 관행에 젖은 기업 관료주의를 혁파할 수 없고 익숙한 것과의 결별을 단행하지 않으면 야성적 초심을 회복할 수 없다는 판단이다. 네이버 카카오가 서로 약속이나 한 듯이 젊은 여성들을 새로운 CEO로 발탁한 이유일 것이다.

지금 기업들이 맞닥뜨리고 있는 경영 환경은 ‘초불안 상태’로 요약된다. 너무나 많은 일이 동시에 벌어지고 있어 무엇부터 해야 할지 가늠할 수 없는 시대다. 인공지능(AI)의 가속적 범용화는 과거 증기기관 발명-철도 개설-전화기 발명-자동차·항공기 발명-핵에너지 개발-개인용 컴퓨터 확산-게놈 프로젝트 발진-스마트폰 등으로 이어지는 인류 혁신 시리즈의 그 어떤 단계보다 단절적이고 와해적인 변화를 예고한다.

한국에는 뛰어난 전문경영인이 많고 저변도 두터워졌지만 생사를 걱정하는 절박감이나 책임감은 오너의 그것들과 천양지차다. 일반화할 수 있는 명제는 아니지만, 성공한 전문경영인들은 대체로 위험회피적으로 변해간다. 지금 누리고 있는 연봉과 사회적 지위가 한순간에 날아가는 것을 두려워한다. 사외이사와 감사위원회 같은 총수 견제장치도 보수적이긴 마찬가지다. 기업이 위험을 감수하는 결정을 주로 말리고 감시하는 쪽이다. 모든 것이 순조롭고 평화로운 시기엔 양측의 상생과 공존이 가능하다. 하지만 앞날이 불안하고 위기감이 커지면 오너들은 안정과 관리를 버리고 기꺼이 위험을 감수한다. 위기와 경고에 둔감해진 장수 CEO들부터 내친다. 충성 경쟁을 한순간에 능력 경쟁으로 바꾼다. 산업 첨단화·고도화 시대에 충성은 총수들에게도 점차 낡은 덕목이 돼 가고 있다. 기업 혁신을 방해하고 거추장스러운 봉건적 허례만 야기할 뿐이다.

그럼에도 오너들의 새로운 선택은 어렵다. 자신만큼 절박하고 경각적이면서 고도의 사업 감각과 안목을 갖춘 인재는 흔하지 않다. 외부 영입도 쉽지 않다. 성공보다 실패 사례가 많다. ‘재벌=기간산업’이라는 한국적 상황에서 혁신의 실행과 책임은 돌고 돌아 기업가정신으로 귀착된다. 과거 정주영 이병철 구인회 최종현 같은 인물들은 재벌이기 이전에 역동적 혁신적 기업가였다. 세계 최고의 부자로 등극한 테슬라 창업자 일론 머스크 역시 그렇다. 지난해 영국 파이낸셜타임스가 ‘올해의 인물’로 선정한 노보노디스크 CEO는 비만치료제 ‘위고비’ 개발을 위해 기업 명운을 걸고 수만 명 단위의 임상시험을 단행했다. 인사를 통해 이룰 수 있는 것은 많지 않다. 단기간에 경쟁력을 급속도로 끌어올리는 마법도 없다. 기업을 움직이는 엔진은 언제나 기업가의 굳센 마음과 정신이다. “파도가 두려워 항구를 떠나지 못하는 배에는 미래가 없다”(강성희 오텍 회장, 2020년 한경 인터뷰)는 말을 좋아한다. 폭풍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훌륭한 전문 경영인의 조력을 받는 것은 그 뒤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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