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하나 점 찍어 그렸다…조각상처럼 감정이 사라진 인물들

입력 2024-01-04 17:54   수정 2024-01-05 01:24


‘그랑드 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1884~1886)는 신인상주의 미술 운동을 이끌었던 프랑스 화가 조르주 쇠라(1859~1891)의 작품이다. 인상주의 미술의 주제나 기법을 수용하면서도 색채에 대한 과학적인 탐구를 통해 인상주의를 개혁하고자 한 것이 신인상주의다. 오늘은 벨 에포크를 대표하는 또 한 명의 작가인 쇠라와 신인상주의를 통해 아름다운 시절의 또 다른 모습을 살펴보고자 한다.

인상주의 미술가들은 자연의 변화를 순간적으로 포착해 그리는 것을 중시한 까닭에 드로잉 과정을 생략한 채 캔버스에 바로 채색하면서 그림을 완성할 때가 많았다. 이 때문에 인상주의 회화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짧은 붓 자국만 가득하고 무엇을 그렸는지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형태가 해체된 것처럼 보이는 경우가 많다. 원근법을 적용하지 않은 채로 그림을 그리는 경우가 많아 화면이 평면적으로 보이는 것도 인상주의 미술의 특징이다.

쇠라는 인상주의의 혁신적인 요소들을 수용하면서도 지나치게 대상이 해체되는 것은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이 때문에 사전 드로잉 단계를 거쳐 작품을 제작해 인물이나 풍경이 입체적으로 보이도록 했다. 특히 인물들은 고전적인 회화의 기법대로 완벽한 비례에 기초해 그렸다. 이런 과정을 거쳐 탄생한 그의 첫 작품이 바로 ‘아스니에르에서 물놀이하는 사람들’(1884)이다.

파리 센강변에 있는 아스니에르 지역에서 물놀이를 즐기는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을 그렸다는 점에서 주제적으로는 인상주의의 영향을 받은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고전미술의 전통과 인상주의의 새로움이 혼합된 이 작품을 쇠라는 당시 가장 권위 있는 미술 전시인 살롱에 출품했지만 결과가 좋지 못했다.

그는 결국 살롱을 벗어나 동료 작가들과 독립 미술가 협회를 조직했고, 신인상주의를 대표하는 기법인 점묘법을 바탕으로 한 새로운 미술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점묘법은 점을 찍듯이 채색하는 기법으로, 물감이 캔버스 위에서 섞이지 않도록 각각의 색점을 병치해 그리는 것이 특징이다.

‘그랑드 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가 바로 점묘법을 본격적으로 반영해 그린 첫 작품이다. 센강변 근처의 그랑드 자트 섬에서 여가를 즐기는 파리 시민들의 모습을 그린 이 작품의 크기는 무려 세로 2m, 가로 3m에 달한다. 이 거대한 작품을 일일이 점을 찍어 그려 작품 제작 기간도 3년 가까이 소요됐다.

노동에 가까운 제작 방식과 제작 기간이 엄청나게 길어지는 단점에도 불구하고 쇠라가 점묘법으로 그림을 채색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19세기 초부터 급격한 발전을 이룬 색채 이론에 대한 관심에서 비롯된 것이다. 물체에는 고정된 색이 있는 것이 아니라 빛의 강도에 따라 색이 다르게 지각된다는 이론이 알려지면서, 빛에 따라 달라지는 자연의 모습을 관찰해 그리기 시작한 것이 바로 인상주의 미술가들이었다. 여기에 더해 빨간색과 초록색처럼 보색 관계의 색을 인접해 놓으면 상대 색을 더 눈에 띄게 만들어준다거나 온색과 난색처럼 색을 온도와 연계하는 이론이 과학적으로 구체화돼 설명되기 시작한 것도 이 시기의 일이다.

쇠라가 미술가로 활동을 본격화한 19세기 말에는 이미 이와 같은 색채 이론이 보편적으로 알려지면서 이것을 적용해 그림을 그리는 화가가 많아지게 된다. 쇠라도 이런 이론들을 섭렵한 뒤 색채를 더욱 체계적으로 분석해 작품 제작에 반영하고자 했고, 그것이 점묘법의 등장으로 이어진다.

쇠라의 점묘법은 보색 대비 이론을 바탕으로 제작된 것이다. 예를 들어 잔디의 초록색을 강조하기 위해서는 초록색 점만 찍는 것이 아니라 보색인 붉은색을 반복적으로 병치해 그리는 식이다. 캔버스 위에 찍힌 무수한 점은 결국 그림을 보는 사람의 눈에서 혼합돼 보이거나 보색이 더욱 강조돼 보인다.

쇠라는 색채와 선, 온도와 감정을 연계해 분석적으로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노란색이나 붉은색 같은 온색은 동적이고 즐거운 느낌을 주기 때문에 상승하는 곡선과 함께 배치하면 이런 감정을 더욱 고조시킨다는 것이다. ‘서커스’(1890~1891)나 ‘샤위’(1889~1890)와 같은 작품에서 쇠라는 노란색과 붉은색을 사용하고 커튼이나 공연자의 치맛자락을 상승하는 곡선으로 그려 공연장의 활기찬 분위기를 배가시켰다. 노란색과 붉은색의 효과를 강조하기 위해 보색에 해당하는 푸른색의 점들도 반복적으로 병치해 채색했다.

이론적이고 분석적인 측면이 강조됐기 때문인지 쇠라의 그림은 상대적으로 절제미가 느껴진다는 평가를 받는다. ‘아스니에르에서 물놀이하는 사람들’이나 ‘그랑드 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는 주말에 여가를 즐기는 사람들에게서 느껴지는 즐거운 감정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 인물들은 감정이 없는 조각상처럼 보이고 이들이 함께한 공간은 시간이 멈춘 것 같은 정적인 세계처럼 보인다.

이런 점 때문에 쇠라의 작품은 인상주의 화가 르누아르의 작품과 종종 비교되기도 한다. 르누아르도 쇠라처럼 다양한 사람이 모여 여가를 즐기는 장면을 자주 그렸는데, ‘뱃놀이 일행의 점심 식사’(1880~1881)가 대표적이다. 이 그림에서는 배 위에서 점심 식사를 하는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시끌벅적한 분위기가 잘 드러난다. 이성들 사이에서 미묘하게 엇갈리는 시선까지 부각되면서 작품을 보는 사람들을 그림 속의 시공간으로 끌어들이는 듯한 매력을 지닌 작품이다. 상대적으로 쇠라의 작품에서는 여가를 즐기는 사람들 사이의 관계와 감정이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

과학적이고 분석적인 인상주의 미술을 만들고자 한 결과 지나치게 감정이 절제돼 보이는 뜻밖의 결과를 가져오긴 했지만, 쇠라의 신인상주의 미술은 고흐나 고갱을 비롯한 동시대의 화가뿐 아니라 마티스와 같은 후배 작가들에게도 영향을 줬다. 쇠라 사후 그와 함께 신인상주의 운동을 이끌었던 폴 시냐크가 저술한 <들라크루아에서 신인상주의까지>가 출간되면서 쇠라의 색채 이론이 체계적으로 소개될 기회도 얻게 된다.

‘그랑드 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가 탄생한 지 100여 년이 넘은 1980년대에 브로드웨이 음악가들은 이 작품을 뮤지컬로 제작했다. ‘조르주와 함께하는 공원에서의 일요일’이라는 제목의 이 뮤지컬은 퓰리처상과 토니상 같은 주요 예술상을 수상했고, 2010년대까지도 뉴욕과 런던에서 여러 차례 공연될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무엇보다 이 뮤지컬 덕분에 그림 속 인물들이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며 그림 속의 정적을 깨고 활기 넘치는 그랑드 자트 섬이 새롭게 탄생할 수 있었다. 쇠라가 인상주의를 재해석해 신인상주의라는 새로운 세계를 창조했고, 후대의 예술가들이 다시 그의 작품에 새로운 해석을 더하는 선순환의 흐름이 만들어진 셈이다. 쇠라의 작품이 보여주듯이 벨 에포크의 예술은 시대를 뛰어넘어 다양한 분야의 예술가에게 여전히 영감의 원천이 되고 있다.

전유신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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