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거주 폐지 법안이 폐기 수순에 이르렀다. 정부는 폐지를 공언했지만 여당과 야당이 팽팽한 대치 속 법안이 국회 문턱을 넘지는 못했다. '실거주 의무를 없애주겠다'는 정부 말을 믿고 청약했거나 계약한 수요자들은 그나마 기대를 걸고 있다.
7일 정치권과 부동산 업계에 따르면 오는 9일 국회 본회의 이전 국토교통위원회 법안심사소위원회(법안소위)는 실거주 의주 폐지를 담은 주택법 개정안을 논의할 가능성이 나온다. 문제는 국회 문턱을 넘을 가능성은 낮다는 점이다. 이번에도 여야가 법안에 합의하지 않으면 폐기될 전망이다.
실거주 의무는 말 그대로 분양 받은 아파트에 살아야 한다는 의무를 지는 것이다. 전매제한과 패키지로 묶이는 제도다. 전매제한 완화는 정부가 시행령을 개정해 벌써 시장에 적용됐다. 실거주 의무는 주택법을 개정해야 하는 사안이다.
전매제한 기간이 완화됐더라도 실거주 의무가 유지되면 실효성이 떨어진다. 일부 자금 조달이 어려운 수분양자들은 입주할 때 전세 보증금을 받아 잔금을 낸다. 실거주 의무가 폐지되지 않으면 집주인이 들어와서 살아야 한다. 전세를 못 놓는다는 얘기다. 이에 잔금 일정도 꼬일 수 있다.
수분양자가 전매제한 기간이 끝나 입주 전 아파트를 팔았는데 실거주 의무 기간을 채워야 하는 아이러니한 상황도 발생한다. 만약 수분양자가 거주 기간을 채우지 않는다면 현행법을 위반하는 것이다. 이를 어기면 1년 이하의 징역 또는 10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최악의 상황에는 한국토지주택공사(LH)에 분양가 수준으로 집을 다시 팔아야 한다.
지난해 2월부터 국회를 표류했던 실거주 의무 폐지 법안은 같은 해 12월 들어 관심을 받기 시작했다. 6일 열렸던 법안소위에서는 주택법 개정안이 아예 논의 대상에 오르지도 못했고, 이후 21일 개정안 논의를 다시 보류했다. 27일 법안소위를 한 차례 더 열어 논의하기로 했지만 이 역시 무산됐다.
실거주 의무 폐지 법안이 쉽사리 처리되지 못하는 것은 여야의 팽팽한 대치 때문이다. 야당은 '갭투자'가 기승을 부릴 것을 염려한다. 실거주 의무가 폐지되면 분양가 상한제가 적용되는 단지에 시세 차익을 목적으로 청약해 입주할 때 전세로 잔금을 치를 수 있어서다. 실거주 의무 때문에 청약하지 않은 예비 청약자들도 있는 만큼 법안 통과로 제도가 폐기되면 형평성에 어긋날 수 있다는 점도 이유다.
여당은 실거주 의무를 폐지하기 어렵다면 제도는 유지하되 집을 팔기 전까지 실거주 의무를 이행하기만 하면 된다는 주택법 개정안을 제안했다. 하지만 야당은 대안책 역시 반대하고 있다. 김인만 김인만부동산경제연구소 소장은 "법안이 통과되는 것이 혼란을 줄이는 가장 좋은 방법이겠지만 통과가 어렵다면 완화안 등을 통해 출구 전략은 열여줄 필요가 있다"고 설명했다.
실거주 의무 폐지 법안과 관련된 수분양자들은 4만가구로 추산된다. 국토교통부에 따르면 2011년 2월 이후 입주자 모집 승인을 신청해 실거주 의무가 적용되는 아파트는 전국에 66개 단지, 4만3786가구다. 실거주 의무가 풀릴 것으로 기대했던 계약자들은 "해결책이 없어 답답하다"는 입장이다.
서울 강동구 둔촌동에 있는 A 공인 중개 대표는 "분양권을 사고팔 수는 있지만 실거주 의무가 있다보니 사실상 전매가 불가능한 셈"이라며 "전세 보증금을 받아 잔금을 내려고 계획했던 수분양자들의 부담이 상당히 커진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건설업계에서도 실거주 의무 폐지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정원주 대한주택건설협회 회장(대우건설 회장)은 실거주 의무를 폐지하는 주택법 개정안에 대해 "시급한 처리가 절실하다"고 강조했다.
한 건설사 관계자는 "지연이자를 물면서 법안이 통과되기까지 기다리는 것도 불가능한 상황이지 않나"라며 "수분양자에겐 안타까운 일이지만 현재 전혀 퇴로가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다만 실낱같은 희망은 아직 남았다. 정부가 임시국회에서라도 통과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방침을 내놨기 때문이다. 김오진 국토교통부 1차원은 지난해 12월 서울 정부종합청사에서 열린 'LH 혁신 및 건설 카르텔 혁파방안' 브리핑에서 실거주 폐지 법안에 관한 기자들의 질문에 "늦더라도 임시국회가 소집되면 다시 한번 야당과 협의해 실거주 의무 폐지 법안이 국회 통과가 되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강조했다.
올해 총선까지 시간이 남은 만큼 극적인 합의에 이를 수도 있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업계 관계자는 "총선이 끝나고라면 모르겠지만 총선 전까지는 가능성이 남았다고 본다"며 "일단 상황을 주시해야할 것"이라고 전했다.
이송렬 한경닷컴 기자 yisr0203@hankyung.com
관련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