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한 미식가’ 주인공의 원래 모델은 여성이었어요. 하지만 남성으로 바꿀 수밖에 없었죠. 원작을 처음 그릴 때(1994년)만 해도 여성이 혼밥하는 시대가 아니었으니까요.”
윤석열 대통령이 “꼭 챙겨 본다”고 말해 화제가 된 일본 드라마 ‘고독한 미식가’. 드라마의 원작자인 구스미 마사유키는 최근 도쿄 기치조지에서 한국경제신문과 한 인터뷰에서 “작품을 만들면서 사회적인 의미를 생각하지 않고 오직 재미만 추구한다”고 했다.
하지만 그가 그린 배경과 인물 설정, 대사 한 줄, 인터뷰에서의 답변 한마디 한마디에는 지난 30년간 일본이 경험한 사회·경제적 서사가 진하게 녹아 있었다. 구스미 작가도 인터뷰 내내 “그러고 보니 그렇네요”를 연발했다.
▷한국에선 중년 남성의 혼밥이 생소했습니다.
“일본은 거꾸로 중년 남성이니까 혼밥을 합니다. ‘고독한 미식가’를 처음 그릴 때 일본은 여성의 혼밥이 확실히 없었어요. 소바나 라멘, 규동 집은 여자 혼자 가는 데가 아니었죠.”(일본 최초의 규동 체인인 요시노야에 따르면 10년 전 매장 고객은 거의 100% 남성이었다. 현재는 고객의 30%가 여성이다.)
▷일본인은 주인공과 달리 적게 먹는데요.
“그건 출연한 가게의 요리를 다양하게 소개하기 위한 드라마상의 설정이죠. 거꾸로 한국에 가보니 양이 많아서 정말 놀랐어요. 이건 이노가시라 고로(‘고독한 미식가’의 주인공)라도 먹을 수 있는 양이 아니던데요. 게다가 반찬 등이 얼마든지 리필이 되잖아요.”
▷주인공이 직장인치고 밥값을 많이 씁니다.
“대신 술을 안 마시잖아요. 그 점을 감안하면 점심값으로 3000~4000엔(약 2만7600~3만6800원) 정도는 괜찮죠. 주인공은 먹는 양이 적은 저의 동경을 투영한 인물이에요. 대신 대식가지만 술은 못 마시는 약점을 부여했습니다.”
▷주량이 어떻게 됩니까.
“마감하고 생맥주 한 잔 정도입니다. 물론 소주도 마시지만 마감이 끝나면 밤이 늦어서 그렇게 많이 마시지 못해요. 대신 여행 가면 꽤 마십니다. 얼마 전에도 도야마현에 가서 혀가 꼬이도록 마셨어요.”
▷SNS로 연결된 현대인이 오히려 혼밥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그건 유행의 측면이 크다고 봅니다. 전 거창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한 프랑스 미디어는 인터뷰에서 드라마 장면을 들며 ‘여기서 혼자서 우동을 먹는 게 왜 맛있나요. 자신과 마주해서입니까’라고 묻더라고요. ‘아니요, 저는 우동과 마주하고 우동을 먹고 있는데요’라고 답할 수밖에요.”
▷거품 경제 붕괴 때 맛집을 찾는 붐이 생겼다는 분석도 있습니다.
“‘고독한 미식가’를 처음 썼을 때가 일본에서 처음 맛집 붐이 일어났을 때이긴 해요. 그래도 전 그런 조류와 관계가 없었어요. 맛집, 여자친구에게 점수 따는 레스토랑 같은 거 전혀 몰랐어요.”
▷경기와 혼밥은 비례관계인 걸까요.
“요코초(작은 술집·식당이 밀집한 좁은 골목길)는 싸니까 경기가 나빠지면 번성할 수 있겠네요. 경기가 엉망이면 서민 식당을 가게 되지, 비싸고 근사한 데 돈을 쓸 수 없잖아요.”
▷주인공이 ‘맛집이 어딨는지 모를 때는 강변으로 가라’고 했습니다.
“저의 맛집 찾는 요령이나 법칙이라기보다 일종의 감이에요. 도쿄 아카바네는 큰 강을 사이에 두고 사이타마현과 경계를 이루는데요. 이런 접점 같은 곳에 흥미로운 마을이 있죠. 다리가 없던 시절 큰 비로 발이 묶인 사람들이 모이면 자연스럽게 가게가 생기고, 그 가게들이 노포(老鋪)가 되니까요.”
▷윤 대통령의 언급으로 화제가 됐습니다.
“깜짝 놀랐습니다. 대식가답게(지난해 3월 한·일 정상회담을 위해) 일본에 오셔서도 엄청 많이 드셨더라고요.”
▷한·일 관계 개선에 공헌했습니다.
“맛있는 거 먹으면서 싸우는 사람은 없지 않나요. 상대국의 맛있는 요리를 먹으면서 그 나라 험담하려는 생각은 안 들잖아요.”
▷작년 한국을 방문했습니다. 한국의 혼밥 사정은 어땠습니까.
“혼자 앉을 수 있는 카운터석이 별로 없더라고요. 단골 이자카야에서 친해진 한국인 학생은 서울의 식당에서 ‘혼밥 손님은 매출에 도움이 안 돼’라는 소리를 듣는 게 정말 싫었다더군요. 만화가 허영만 화백도 혼자 식당에 갔을 때 ‘2인분부터 주문 받습니다’라는 소리를 듣는 게 싫다더군요.”
▷혼밥을 못 먹는 한국인이 많습니다.
“머릿속으로 이노가시라 고로가 됐다고 생각해 보면 어떨까요. 직장 상사 등에게서 ‘고로가 돼 거기 가서 먹어보고 와’라는 명령을 받은 셈 치고요. 가게 주인한테 혼나더라도 그거대로 좋은 체험이겠죠.”
▷본인은 혼밥을 먹을 때 어땠습니까.
“처음 혼밥을 한 19세 때는 저도 무서웠어요. 하지만 가게 주인도 가게 문을 열고 누가 들어올지 모르니 무섭긴 마찬가지예요. 그렇게 생각하면 혼술, 혼밥에 대한 생각이 바뀌게 됩니다.”
▷일본의 중년 남성 관광객이 한국에서 혼밥에 도전할 수 있을까요.
“스마트폰 번역기가 있잖아요. 요즘엔 한국도 가게 밖에 요리 사진과 가격을 붙여 놔서 어떤 가게인지 알기 쉬워졌어요. 1985년 처음 한국에 갔을 때 ‘맥주’라는 단어만 알고 가게에 들어갔어요. 메뉴판에서 읽을 수 있는 게 없으니 정말 용기를 내야 했지만 매우 즐거웠어요.”
▷‘고독한 미식가’가 현지의 명물 요리를 소개하지 않는다는 아쉬움도 있습니다.
“그럴 땐 넘쳐나는 맛집 프로그램을 보면 되죠. ‘고독한 미식가’는 맛집 소개에서 가장 멀어져야 할 드라마입니다.”
▷서울 부산 전주의 식당들이 ‘고독한 미식가’에 등장했습니다. 또 다른 한국 지역이 나올 가능성이 있습니까.
“있습니다. 아직 어디일지는 몰라도요. 여전히 모르는 도시와 현지 문화, 먹거리가 가득 있으니까요.”
구스미는 “한국 요리는 고기, 생선 가릴 것 없이 채소를 가득 곁들여 먹는 게 정말 부럽다”고 했다. 홍어나 오징어 제육볶음같이 해산물과 육류, 야채를 한 번에 먹는 한국 식문화에 대해서도 “일본은 통상 회와 고기를 같이 먹지 않는다”고 했다.
복어 요리도 한국과 일본 간 차이가 큰 사례로 소개했다. 구스미는 “서울 무교동의 한 복집에서는 큼직한 복어껍질을 구워 먹는다”며 “일본은 복어껍질 무침은 먹어도 복어껍질을 정식 메뉴로 먹진 않는다”고 했다. 그는 “에도시대부터 복어 독 없애는 기술을 터득한 이시카와현은 일본에서 유일하게 독성이 가장 강한 난소를 맛볼 수 있는 곳”이라고 말했다.
주류 문화의 차이도 언급했다. 한국은 술을 먹고 안주를, 일본은 안주부터 먹고 술을 곁들이는 문화에 대해 “일본은 독주를 마시는 습관이 없기 때문인 것 같다”고 말했다.
호세이대 사회학부를 졸업한 뒤 1981년 단편만화 ‘야행’으로 데뷔했다. ‘고독한 미식가’는 1994~1996년 연재한 작품이다. 원작이 10년이 지나 다시 인기를 끌면서 2012년 드라마로도 제작됐다.
에세이 작가와 책 디자이너, 음악가이기도 하다. 18세 때 결성한 밴드 스크린톤스에서 지금까지 활동하고 있다. ‘고독한 미식가’에 매 시즌 40~50곡씩 사용되는 배경음악은 모두 스크린톤스의 곡이다.
도쿄=정영효 특파원 hugh@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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