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일 <한경닷컴>이 입수한 영상에 따르면 전문위원 A씨는 작년 11월 전 세계 여성 이사들로 꾸려진 비영리 기구 '세계여성이사협회'(WCD) 창립 7주년 포럼에 참석해 국민연금의 투자정책 기조를 설명하던 중 "(여러분들이 가끔 질문하는데) ESG를 매우 잘하는 제약회사가 있다. 너무 훌륭하고 기업 성장성과 수익률도 매우 좋은 기업이라고 한다"며 "그런데 이 기업이 피임약을 만드는 회사라고 한다. 국민연금이 이런 기업에 투자할 수 있을까"라고 말했다.
이어 A씨는 "왜냐하면 국민연금 제도의 지속성은 출산율이 가장 좌우하는 것"이라며 "이런 부분에 대한 깊은 고민을 가지면서 거기에 따르는 ESG와 국민연금의 지속 가능성에 대한 고민을 지금 하고 있단 말씀 드린다"고 밝혔다.
국민연금은 그동안 기업 성장성과 환경·사회·지배구조(ESG) 등의 투자원칙을 강조해왔다. 심지어 전체 자산의 절반 이상을 책임투자 자산으로 할당하고 있다. 그런데 기금 투자정책의 방향을 결정하는 위치에 있는 A씨가 '심각한 저출산 시대인 만큼 국민연금이 피임약 제조 회사에 투자하긴 어렵다'는 의견을 밝힌 것이다.
이는 자기결정권으로서 여성의 피임권리를 존중하지 않는다는 취지로도 해석될 수 있다보니 참석자들을 중심으로 논란이 확산되고 있다. 세계 3대 연기금인 국민연금의 대표자로 나선 인물이 공개석상에서 피임권에 대한 경솔한 발언을 했다는 것이다.
해당 자리에 참석했던 관계자는 "올바른 피임은 여성 건강, 인권과 연결된다"며 "국민연금이 피임약을 만든다는 이유로 '좋은 기업 투자'를 고민하는 것은 ESG 가치를 스스로 훼손하는 시대착오적 발상"이라고 비판했다. 참석했던 다른 관계자도 "출산 제고 차원의 투자 방침을 밝힌 것이라면 문제가 아니지만 특정 업종을 콕 집어 안 좋게 보겠다고 공언한 것은 상당히 위험한 발언"이라고 꼬집었다.
A씨의 발언이 논란의 조짐을 보이자 행사를 주최한 협회 측은 당초 일부 대상으로 공개했던 포럼 영상을 비공개로 돌렸다. 권선주 세계여성이사협회 회장은 "문제의 소지가 있다면 조치를 취하는 게 맞다"며 "영상을 바로 내렸다"고 밝혔다.
기금운용위를 관할하는 보건복지부 측도 발언에 문제가 크다고 보고 관련 조치를 대응 중인 상황이다. 보건복지부 국민연금재정과 관계자는 "해당 발언이 있었는지 인지를 못하고 있었다. 여지 없이 성 인지 감수성이 부족한, 부적절한 발언이었다고 판단된다"며 "이런 경우가 전례가 드물어 대응 매뉴얼이 있진 않지만, 방안을 고민하겠다"고 말했다.
A씨는 큰 문제가 아니라는 입장이다. A씨는 기자와의 통화에서 "제 소견도 아니고, 공단 입장도 아니다"라며 "기금운용에도 제도를 고려해야 한다는 말을 하기 위해 '농담성 사례'를 빌린 것"이라고 해명했다.
하지만 '농담'이라고 여기기에는 무게감이 있는 자리였다. 포럼 내 'ESG시대-바람직한 이사회의 역할'을 주제로 한 패널 토론에서 A씨가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좌장으로는 A씨 외에 최운열 전 민주당 의원, 박진회 SK 이사회 의장, 정준혁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등 정재계에 학계까지 패널로 나왔다.
A씨는 국민연금 상근전문위원으로 현재 기금운용위원회 투자정책위원장을 맡고 있다. 투자정책전문위는 중장기·연간 기금운용을 위한 주요 계획을 수립하고, 기존 투자정책 변경과 새 투자정책 개발 등을 심의하는 곳이다. 국민연금기금의 운용·관리의 최고 의사결정기구인 기금운용위원회는 A씨를 비롯해 세 명의 상근전문위원을 두고 있다. 이들 임기는 총 3년으로 투자정책전문위와 수탁자책임전문위, 위험관리·성과보상전문위 등 3개 위원회의 수장직을 번갈아 가며 1년씩 맡고 있다.
한편 보건복지부에 확인한 결과 국민연금 내부 책임투자 관련 가이드라인에 출산·피임 등을 언급한 조항은 없었다. '특정 특성을 띠는 기업에 투자하지 않겠다'는 취지의 내용도 없는 것으로 파악됐다. 국민연금 관계자는 "출산이나 피임을 투자로 연결짓는 것 자체가 위험할 수 있기 때문에 당연히 가이드라인에 관련 내용은 없다. 다만 61개 평가지표 중 하나로 육아휴직·출산휴가 제도 등 가족친화 정도가 포함돼 있다"고 설명했다.
진형혜 한국여성변호사회 부회장은 "국민이 위탁한 돈을 관리하는 곳이 임신에 대한 여성의 결정을 두고 언급할 일이 아니다"라며 "이런 사례를 농담으로 든다는 게 가능한지 의문"이라고 지적했다.
신민경 한경닷컴 기자 radio@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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