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가야금과 김장김치

입력 2024-01-11 18:07   수정 2024-01-12 00:10

내게는 특별한 스승님이 계시다. 이영희 선생님은 국가무형문화재 가야금산조의 예능보유자이며 농부다. 선생님의 집 앞 마당에는 널찍한 밭이 있다. 가야금 줄처럼 가지런하게 심어진 밭고랑에는 고추며 상추, 쑥갓, 오이, 가지, 호박 등 다양한 작물이 자란다. 그 작물로 차려진 밥상은 선생님의 상징이다. 갓 지은 흰쌀밥과 적절하게 간이 밴 가지찜 무침, 새콤한 오이지, 토란국, 호박 찌개와 호박잎 찜 등이 시골밥상처럼 참 정겹다. 수북하게 퍼 주시는 밥공기를 보며 기겁하다가도 슬며시 한 공기, 두 공기 더 먹게 되니 선생님의 밥상은 마술 같다.

그런 선생님 댁에 가장 큰 행사는 김장이다. 채칼을 사용하면 맛이 덜하다며 손수 무채를 썰다가 오른 손목에 무리가 가기도 했고, 무거운 절인 배추를 번쩍번쩍 들어 올리다 허리를 못 펴기도 하셨다. 김장이 끝날 즈음이면 그 특별한 김치를 ‘하사받을’ 이름 앞으로 한 통, 두 통씩 몫을 지어 김치통을 쌓으신다. 선생님의 특별한 김치 명단에 내 이름이 들어간 것은 어느 날인가 배워보라며 날 가야금 앞에 앉히신 이후였다.

선생님의 교수법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자세였다. 가야금 줄을 무리하게 힘을 줘서 튕기려고 하지 말고 줄 위에 자연스럽게 손을 올려놓되, 마치 배가 물 위에 떠 있듯 몸의 힘을 완전히 빼서 자연스러워야 한다는 것이다. 실제 그렇게 가야금을 타는 선생님의 모습은 한 마리 학처럼 아름다웠고, 손끝에서 울리는 가야금 소리는 한참 물기 먹고 싱그럽게 피어오르는 싱싱한 상춧잎처럼 낭창거렸다.

최근 선생님은 국악 후학 양성을 위해 지금 살고 계시는 200억원 상당의 토지와 집을 문화재청에 기부하셨다. 이 일로 큰 상을 받게 된 날 선생님은 정말 짧고 강한 한마디를 하셨다. “그저 가야금을 더 잘하고 싶었을 뿐이었는데 이 자리까지 왔습니다. 감사합니다.”

세상 이치를 넘어 도의 경지에 이른 86세 선생님의 인생. 그 수많은 사건과 사연, 시간을 모두 압축한 말씀은 그렇게 자신의 일을 열심히 하라는, 그러다 보면 좋은 결과가 있을 것이라는 뜻이었다. 추운 겨울에도 난방비를 아끼느라 그 넓은 집에서 꼭 필요한 것 외에는 보일러를 꺼놓는 선생님. 스승의 탄생을 기념하는 화려한 공연보다는 ‘김윤덕류 가야금산조’로 대학에 입학하는 학생들 모두에게 장학금을 지급하는 선생님. 남의 허물은 절대 입에 담지 않으시는 선생님, ‘기름 한 방울 안 나는 나라에서 왜 낭비하냐’며 기어이 버스와 지하철을 타고 다니시는 선생님. 그런 선생님의 김장 포기가 조금씩 줄어드는 것을 보면 참 마음이 아프다. 그 누구도 흐르는 시간을 잡을 수도 없고 어찌할 수 없지만, 선생님의 염원이 빨리 이뤄지고 그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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