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모델링 아파트들이 벼랑 끝으로 몰리고 있다. 정부는 재건축·재개발 단지들의 사업 추진 속도를 높여주기 위해 '대못'을 뽑고 있지만 리모델링 단지에는 더 엄격한 잣대를 들이고 있어서다. 리모델링 단지 사이에선 "이제라도 재건축으로 사업을 틀어야 하는 것 아니냐"는 말이 나오고 있다.
15일 부동산 업계에 따르면 정부가 1·10 부동산 대책에서 재건축 단지들의 규제를 완화하는 패스트트랙 정책을 발표하면서 리모델링 사업이 불리해졌다. 리모델링은 재건축보다 사업성이 떨어지지만 규제 문턱이 낮아 사업이 빠르게 진행되면서 각광을 받았지만, 이제는 소용이 없게 됐다.
1·10 부동산 대책에 따라 아파트를 지은 지 30년이 넘었다면 안전진단 없이 재건축을 시작할 수 있도록 했다. 선도지구 지정, 용적률 상향 등 혜택도 뒤따른다. 재건축과 리모델링 사업의 출발선이 완전히 달라졌다.
이번 정책으로 혜택을 가장 많이 받을 것으로 예상되는 1기 신도시 내 리모델링 단지에선 벌써 잡음이 나온다. 특히 상대적으로 평균 용적률이 낮은 일산(169%), 분당(184%) 등에선 이번 대책으로 주민 간에 갈등이 고조되고 있다. 이들 단지는 상대적으로 재건축 사업으로 돌아설 만한 여력이 있어서다.
분당에서 리모델링을 추진하고 있는 한 단지 조합원은 "정부에서 재건축 사업을 제대로 밀어주고 있지 않느냐. 역차별이나 다름없다"며 "리모델링 사업은 완전히 찬밥 신세가 됐다. 조합원들 사이에서 ‘리모델링 대신 재건축으로 선회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는 중"이라고 설명했다.
이 단지 인근에 있는 A 공인 중개 관계자는 "조만간 열릴 리모델링 분담금 총회에서 리모델링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낼 것이라는 얘기까지 나오고 있다"며 "사업이 원활하게 진행되긴 어려워진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규제 완화가 재건축과 재개발 단지에 쏠리고 있다는 점 말고도 리모델링 단지들이 닥친 악재는 또 있다. 필로티(비어 있는 1층 공간) 설계와 이에 따른 최고 1개 층 상향에 대한 판단을 기존 수평 증축에서 수직 증축으로 바꾸기로 하면서다. 수평 증축은 1차 안전진단으로도 가능하지만, 수직증축을 하려면 2차 안전진단을 추가로 거쳐야 한다. 재건축 사업 단지에선 안전진단 면제 얘기가 나오는 와중에 리모델링 단지들은 안전진단을 추가로 받아야 하는 상황이다.
서울시리모델링주택조합협의회(서리협) 관계자는 "이 문제는 서울뿐만 아니라 다른 지자체에도 해당하는 부분"이라면서 "리모델링 단지들 대부분이 1층을 필로티 구조로 전용해 수평 증축하는 방식을 선택했는데 유권해석이 바뀌면서 사업 지연이 예상되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도시정비사업에서 조합원들의 분담금이 늘고 있다는 점도 부담이다. 그나마 재건축이나 재개발의 경우 일반 분양 물량이 꽤 많다. 이보다 사업성이 낮은 리모델링 단지들은 일반 분양 물량이 많지 않다. 결국 조합원들이 분양해야 하는 금액이 더 늘어난다는 얘기다.
리모델링 추진 단지에 거주하는 한 조합원은 "아무래도 일반 분양 물량이 적어 통상적인 재건축이나 재개발 단지보다는 더 부담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며 "사업 속도가 재건축, 재개발보다 더 늦어지면 돈이 더 늘어날 게 뻔하지 않느냐. 부담되는 상황이다"고 토로했다.
전문가들은 당분간 리모델링 단지들이 속도를 내긴 어려울 것이라고 내다봤다. 김제경 투미부동산 소장은 "재건축과 리모델링의 사업 시작 출발선부터가 달라졌다고 볼 수 있다"며 "재건축 단지와 리모델링과 재건축 사이에서 고민하고 있던 단지들의 선택지는 확실해졌지만, 재건축을 추진할 수 없는 단지와 이미 리모델링 사업을 진행 중인 단지들은 당분간 사업이 난항에 빠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다만 일부 전문가들 사이에선 '기대감'에만 매몰돼 리모델링에서 재건축으로 갈아타선 안 된다는 지적도 나온다. 김예림 법무법인 심목 변호사는 "사실상 지은 지 30년이 넘어가면 안전진단은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 게 사실"이라면서 "안전진단 완화 역시 도시정비법 개정사항이다. 국회 문턱을 넘지 못하면 실거주 의무가 폐지되지 않은 것 같은 일이 벌어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안전진단도 중요하겠지만 더 중요한 것은 어떤 단지가 얼마나 용적률 인센티브를 받을 수 있을지"라면서 "하지만 이 역시 정해지지 않았기 때문에 막연한 기대감에 리모델링에서 재건축 등으로 사업을 선회해선 안 된다"고 덧붙였다.
이송렬 한경닷컴 기자 yisr0203@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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