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루 유리문 깨지는 소리에 놀라 깼다. 건넌방에서 일찍 잠들었던 내가 급히 뛰어나갔다. 안방에 있던 가족들도 모두 놀라 마루로 나왔다. 마당에 불을 켜자 눈 내리는 밤에 늦게 귀가하던 아버지가 계단을 올라오다 미끄러져 웅크리고 있었다. 무릎을 찧어 일어서지 못한 아버지가 불 켜진 안방에 소리를 질렀으나 기척이 없자 돌을 던져 마루 유리문을 깬 거였다. 내가 얼른 부축해 방안으로 옮겼다. 숨돌린 아버지는 “그렇게 소리를 질러도 못 듣느냐”며 심하게 나무랐다.
바로 큰 망치를 가져오라고 한 아버지는 안방 아랫목 벽체를 힘껏 쳐내 구멍을 냈다. 내가 건네준 망치로 구멍 난 벽을 더 내려치자 낡은 한옥이라 쉽게 허물어졌다. 안방에서 마루로 나가는 미닫이문 옆 벽면은 원래 창이 나 있었는지 위아래에 모두 통나무를 건너질러 마감이 돼 있었다. 눈 쌓인 마당이 대문까지 훤히 내다보였다. 찬바람 들어오는 창은 신문지로 가려 막았다. 이튿날 새벽부터 목공소에 주문해 밖으로 열리는 두 쪽 여닫이 창문을 달고 창호지를 발랐다. 부엌으로 통하는 창문 바깥에는 쪽마루도 깔았다. 부엌에서 마루를 통해 안방 미닫이를 열고 들어와야 했지만, 소소한 물건은 창문을 열고 바로 안방에 들여올 수 있게 됐다. 안방에 앉아 창을 열고 부엌에서 일하는 어머니를 쪽마루로 부르는 게 쉬워진 아버지는 흡족해했다. 창 아래 설치된 높은 문지방인 머름(遠音)에 팔을 걸치고 밖을 내다보는 걸 아버지는 무척 즐겼다.
창을 낸 그 날 저녁 아버지는 하루 만에 낸 창을 ‘눈꼽재기창’이라고 알려줬다. 여닫이 옆에 작은 창을 내 문을 열지 않고도 밖을 내다볼 수 있게 만든 창을 일컫는 순우리말이다. 큰 문을 열지 않고서도 밖에 누가 왔는지 살피는 눈꼽재기창은 창이 작은 것을 눈곱에 비유한 애교스러운 고안이고 표현이다. 격자창 끝의 한 격자에는 유리를 달아 문을 닫아놓아도 밖을 살필 수 있는 진짜 눈곱만한 창을 냈다. 아버지는 “시골집에도 있었다. 한옥에서 가장 멋스러운 부분이다”라며 “안방 아랫목에서 시종이나 노비들의 동정을 넌지시 살피기 위하여 밖을 내다볼 수 있도록 만든 작은 창이다. 밖을 내다볼 때 일일이 미닫이를 여닫는 수고를 덜 수 있다”라고 유익함을 설명했다. “방 안의 사람은 자신을 외부의 시선이나 한기에 노출하지 않으면서도 집 안팎의 동정과 손님의 출입을 파악할 수 있는 쓸모있는 창이다”란 말도 보탰다.
아버지는 “전에 살던 사람이 왜 창을 없앴는지는 몰라도 들어오는 복을 막은 거다”라며 고사성어를 들어 한밤에 벽을 뚫은 일을 정당화했다. 인용한 고사성어가 ‘수수방관(袖手傍觀)’이다. 군에서 제대해 복학을 기다리던 나는 그때까지 많이 듣던 저 성어가 수수와 관련된 건 줄로 생각했다. 아버지는 눈꼽재기창 옆에 놓인 소반을 끌어당겨 한자로 적었다. 수수방관은 ‘손을 소매 속에 넣고 옆에서 본다’란 말이다. 아버지는 “방(傍)자는 ‘곁’이나 ‘가까이’라는 뜻으로 사람 인(人)자와 곁 방(旁)자가 결합해 ‘곁에 있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만들어졌다”라고 했다. 저 성어는 중국 당(唐)나라의 유명한 문학자인 한유(韓愈, 768~824)가 문체개혁을 함께 했던 친구 유종원(柳宗元)이 죽었을 때 지은 ‘제유자후문(祭柳子厚文)’에 나온다. 아버지는 원문을 써서 보여줬다. “나무를 잘 베지 못하는 사람은 손가락에서 피가 나고 얼굴에 땀이 범벅되는데, 나무를 잘 베는 장인은 오히려 옆에서 쳐다보며 손을 거둬 옷소매 속에 넣고 있다[不善爲斫 血指汗斫 巧匠旁觀 縮手袖間].” 아버지는 “유종원의 명문장이 널리 알려지기 전 떠난 것을 애달파하는” 글이라며 지금은 의미가 많이 변했다고 했다.
이어 아버지는 “내가 열지 않으면 복은 커녕 화도 들어오지 않는다”며 바깥의 움직임에 무심함을 지적했다. 이어 “자경(自警)의 뜻으로 착념하라”며 열린 마음을 키우는 데 필요한 인성으로 세 가지를 들었다. 다른 이의 관점에서 이해하고 그의 감정을 이해하고 존중하는 공감력이다. 두 번째는 다른 사람의 생각이나 행동이 자신과 다르더라도 존중하는 힘, 즉 포용력이다. 마지막으로 개방성을 들며 곧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과 도전 정신을 갖는 능력이다”라고 했다. 말은 어렵지는 않지만, 망치로 얻어맞은 것처럼 절실하게 깨달아야 하고, 몸에 배게 하자면 오랫동안 애쓰지 않으면 얻기 어려운 성품이다.
<한경닷컴 The Lifeist> 조성권 국민대 경영대학원 객원교수
"외부 필진의 기고 내용은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독자 문의 : thepen@hankyung.com
관련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