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한다던 K반도체·배터리마저…미래산업 경쟁 순위서 사라졌다

입력 2024-01-17 18:22   수정 2024-01-18 02:25

고급 데이터 분석, 소형 위성, 첨단 반도체 설계, 양자 컴퓨팅, 유전자 분석….

하나같이 10년 후 글로벌산업 지형도는 물론 국가 경쟁력 순위도 뒤흔들 수 있는 미래 기술이다. 미국과 중국은 물론 인도 등 신흥강국이 매년 수십조~수백조원을 이들 분야 연구에 투입하는 이유다.


한국은 어디쯤 있을까. 호주 정부가 세운 ‘국가 싱크탱크’인 호주전략정책연구소(ASPI)의 ‘글로벌 핵심기술 경쟁 현황’ 자료는 “한국의 미래 성장엔진이 식어가고 있다”는 걸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64개 핵심 미래 기술 중 위에 열거한 기술을 포함한 38개 분야에서 5위 안에 들지 못했기 때문이다. 한국이 잘한다고 자부해온 반도체와 배터리, 6G도 지금이 아니라 5~10년 뒤 상용화될 미래 기술로 보면 중국과 미국에 크게 밀리는 것으로 나타났다.
○국가대표 산업도 밀린다
ASPI 자료에 있는 ‘고급 집적 회로 설계·제조’ 분야 톱5 국가는 미국-중국-인도-독일-이탈리아 순이다. ‘반도체 왕국’ 대한민국의 이름은 없다. 설계가 약해서다. 한국은 전체 반도체 시장의 30% 정도를 차지하는 메모리에선 세계 1위지만 팹리스(반도체설계 전문 기업)와 파운드리(반도체 수탁생산)를 합친 시스템반도체에선 별다른 존재감이 없다. 산업연구원에 따르면 2022년 한국의 시스템반도체 시장 점유율은 3.3%로 대만(10.3%), 일본(9.2%), 중국(6.5%)에 밀렸다.

ASPI의 조사 결과에는 “앞으로 격차가 더 벌어질 것”이란 의미가 담겨 있다. “이번에 조사한 첨단기술은 5~10년 뒤 관련 산업 경쟁력으로 이어진다”고 ASPI가 밝혔기 때문이다. ‘기술강국’ 미국과 정부 지원을 등에 업은 중국이 향후 첨단반도체 설계 분야를 휩쓸 가능성이 높다는 얘기다.

한국의 핵심 먹거리로 자리잡은 배터리에서도 경고음이 커지고 있다. 많은 사람이 ‘전기차 배터리 세계 1위’라고 하면 LG에너지솔루션, 삼성SDI, SK온 같은 한국 기업을 떠올린다. 틀렸다. 시장을 리드하는 기업은 중국 CATL이다. ASPI의 조사 결과는 “이런 트렌드가 바뀌지 않을 것”이란 의미다. 중국의 전기배터리 분야 미래기술 점유율은 65.5%로 한국(3.8%)을 압도했다.

리밍싱 중국기업연합회 부회장이 2년 전 한국의 산업경쟁력에 대해 “반도체 성장동력이 떨어졌는데 미래에 비교우위를 지닐 수 있는 기술마저 눈에 띄지 않는다”고 비아냥거린 이유가 여기에 있다.
○기업 자율성 높이는 국가전략 필요
고령화 시대를 맞아 확 커지고 있는 바이오 분야의 상황은 더 심각하다. 셀트리온과 삼성바이오로직스 덕분에 위탁개발생산(CDMO), 바이오시밀러(복제약) 분야만 강할 뿐, 정작 핵심인 바이오 신약에선 ‘걸음마’ 단계여서다. 그러다 보니 한국의 세계 바이오 시장 점유율은 1% 정도에 그친다.

생명공학·유전자·백신 분야에 대한 ASPI의 진단도 비슷하다. 유전자 서열 분석 등 7개 기술에서 한국이 톱5에 들어간 건 유전공학과 생물학적 제조 두 개뿐이다. 그나마 기술 점유율은 2~3%로, 중국과 미국의 발끝에도 못 미친다.

바이오업계 관계자는 “중국은 개발 중인 바이오시밀러만 100개가 넘는다”며 “바이오 분야 미래기술도 많이 확보한 만큼 한국이 넘어서기 힘들어질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정부 주도로 장기간에 걸쳐 기술을 키운 중국 전략이 빛을 발하기 시작한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중국이 2015년 첨단산업 중심으로 구조를 전환하기 위해 ‘중국제조 2025’를 시작하면서 전기차와 배터리산업을 빠르게 키운 게 대표적인 예다.

반면 한국은 기업가의 역동성을 떨어뜨리는 규제와 반기업 정서만 넘쳐난다. 예컨대 한국 대표 기업 삼성전자를 이끄는 이재용 회장은 2018년 이후 6년째 사법 리스크에 발목이 잡혀 있다. 이 회장은 경영 전면에 나선 이후 의욕적으로 미래 먹거리와 주력 사업에 대한 전면적 투자 계획을 내놨지만 경영에 온전히 집중할 수 없는 상황이 됐다.

ASPI는 “기업가의 자율성을 높일 수 있는 국가 차원의 전략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황정수/김우섭 기자 hjs@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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