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불황 속에서도 국내 주요 백화점들이 일제히 VIP 고객 기준을 상향하고 있다. 전반적인 소비 심리는 둔화했지만, VIP 고객들의 '초고가 소비'는 여전할 것이라는 판단에서다. 경기 변동에 민감한 일반 고객보다는, 꾸준히 고액 소비를 하는 충성 고객에 집중해 매출 볼륨을 유지하겠다는 전략으로 읽힌다.
○VVIP 등급 신설 나서
22일 백화점 업계에 따르면 현대백화점은 올해 기존 최고 VIP 등급인 '자스민 블랙'보다 높은 '프레스티지' 등급을 신설했다. 현대백화점 본점·무역센터점·판교점의 자스민 블랙 고객 중 구매 액수와 내점 일수 등 자체 기준에 따라 소규모로 선정된다. 일종의 VVIP인 셈이다. 프레스티지 고객에게는 발렛 서비스 확대, 마일리지 추가 적립을 비롯해 개인 맞춤형 서비스가 제공된다.
기존 최고 등급이었던 자스민 블랙의 기준도 최근 상향됐다. 당초 연 구매금액 1억2000만원 이상이었던 기준이 1억5000만원으로 올랐다. 자스민 블루도 8000만원에서 1억원으로, 자스민은 5500만원에서 6500만원으로 조정됐다.
신세계백화점도 마찬가지다. 구매실적 상위 999명을 대상으로 하는 '트리니티'와 바로 아래 등급이었던 '다이아몬드' 사이에 새로운 구간이 신설됐다. 연 구매금액 6000만원 이상과 1억원 이상으로 나뉘어 운영되던 '다이아몬드' 등급 기준을 7000만원 이상으로 통합하고, 1억2000만원을 기준 금액으로 하는 새로운 등급을 만든 것이다. 신세계백화점의 최고 등급인 트리니티의 경우 연 2억~3억원 정도를 구매해야 등급이 부여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매출 절반이 VIP에서 나와
백화점들이 VIP 기준을 올린 건 VIP 혜택의 희소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다. 코로나 이후 이어진 폭발적인 보복 소비로 VIP 구매금액 기준을 충족하는 고객들이 많아졌고, VIP 전용 라운지가 붐비면서 고객 불만이 제기됐다는 게 백화점 관계자의 설명이다. 업계에서는 코로나19 이전과 비교할 때 VIP 선정 인원은 50% 정도 늘어난 것으로 보고 있다.
올해 소비심리가 지난해보다 더 악화할 것으로 점쳐지면서 백화점들이 충성고객 이탈을 막는 데 힘쓰고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경기 변동에 민감한 일반 고객들이 백화점 소비를 줄일 공산이 크지만 이들 '큰손' 고객들은 불경기에도 꾸준하게 큰 규모의 지출을 하기 때문이다.
이 고객들은 백화점 매출의 상당수를 견인하고 있다. 신세계백화점 강남점은 최근 지난해 고객의 49.9%가 VIP라고 공개한 바 있다. 압구정 현대백화점 본점도 VIP의 매출 비중이 60% 안팎인 것으로 알려졌다. 업계에서는 '상위 1% 고객이 점포 매출의 20~30%를 차지한다'는 이야기까지 나온다. 백화점 관계자는 "올해 불경기가 본격화되면서 소비의 양극화가 더 심화할 것"이라며 "경기 영향을 덜 받는 VVIP 고객들을 위한 마케팅을 강화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올해도 명품 시장은 성장
보복 소비 열풍이 사그라들고 있지만 명품 등 '초고가 시장'의 성장세는 이어진다는 게 업계의 중론이다. 성장 폭은 줄겠지만, 꾸준히 우상향한다는 것이다. 글로벌 컨설팅기업 맥킨지가 최근 발간한 '스테이트 오브 패션 2024(State of Fashion 2024)' 보고서에 따르면 올해 명품 패션 산업 성장률은 3~5% 수준으로 예상된다. 지난해(5~7%)보다는 낮지만, 성장세는 유지된다고 본 것이다. 이는 비(非)명품 패션 산업 성장률 전망치(2~4%)보다 높다.
업계에서도 명품 수요가 완전히 꺾인 건 아니라고 보고 있다. 에·루·샤(에르메스·루이비통·샤넬)로 대표되는 주요 명품 브랜드의 인기 제품의 경우 여전히 구하기 쉽지 않다는 점이 이를 뒷받침한다. 백화점의 주요 점포들이 꾸준히 명품 브랜드 유치전을 벌이고, 가격대가 높은 해외 패션 브랜드를 신규 입점시키는 것도 이와 같은 맥락이다.
일각에서는 지난해부터 백화점 명품 성장률이 둔화한 이유는 '명품 수입량이 줄었기 때문'이라고도 보고 있다. 소비 심리가 줄어든 것도 있지만, 국내로 들어오는 명품 물량 자체가 감소한 영향도 무시할 수 없다는 것이다.
패션업계 관계자는 "코로나19 이후 유럽으로 명품 쇼핑을 가는 관광객이 급감하면서 유럽의 재고가 국내로 대거 들어오게 됐는데, 당시의 보복 소비 열풍과 맞물리면서 국내 명품 매출이 급격히 늘었다"며 "최근 해외여행이 재개되면서 유럽의 물량이 현지에서 많이 소화되고 있고, 자연스럽게 국내 백화점에서 판매되는 물량도 줄어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양지윤 기자 ya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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