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AI)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한 건 대략 2016년부터였다. “세상을 바꿀 기술”이라며 구글 애플 아마존 마이크로소프트(MS) 등 빅테크들이 AI 스타트업 인수에 열을 올리기 시작한 게 바로 이때였다. 국내에서도 알파고가 ‘바둑 최강’ 이세돌을 꺾으며 온 국민이 AI의 위력을 실감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AI 기술을 손에 넣기 위해 ‘올인’해야 할 우리 기업들의 정신이 다른 데 팔렸었기 때문이다. 재계 1위 삼성이 그랬다. 국정농단 수사로 이재용 회장을 비롯한 수뇌부가 재판, 수감에 몸과 마음을 빼앗기는 동안 AI 주도권은 해외 라이벌 기업에 완전히 넘어갔다. 각종 노동·환경 규제에 손발이 묶인 다른 기업들도 상황은 비슷했다.
그렇게 ‘AI 블루칩’들은 구글(API닷AI·AI매터·할리랩스), 애플(리얼페이스·래터스데이터), 아마존(하비스트닷AI·그래피크), MS(말루바) 손아귀에 들어갔고 ‘AI 천재’들 역시 빅테크 품에 안겼다. 전문가들은 이때 ‘잃어버린 시간’이 시차를 두고 대한민국의 미래 첨단기술 경쟁력을 떨어뜨린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애플도 발 빠르게 움직였다. 글로벌데이터에 따르면 애플은 2016~2020년 빅테크 중 가장 많은 25개 AI 기업을 인수했다. 이때 인수한 인덕티브, 보이시스 등은 애플의 AI 기술 고도화에 밑거름이 됐다.
미국이 민간기업 주도로 첨단산업 경쟁력을 키웠다면 중국은 정부가 사령탑을 맡았다. 2015년 첨단산업 중심으로 산업 구조를 전환하기 위해 ‘중국제조 2025’를 시작한 것이다. 돈과 사람이 투입되자 중국은 단번에 AI는 물론 전기차, 배터리 분야 강자로 도약했다.
첨단기술 확보에 신경 쓸 여력이 없기는 다른 기업도 마찬가지였다. 매일같이 ‘밤샘 연구’하는 실리콘밸리와 달리 국내 연구원들은 한동안 주 52시간제에 갇혀 ‘오전 9시 출근, 오후 6시 퇴근’을 반복해야 했다. CEO를 형사 처벌할 수 있는 벌칙 조항만 1000개가 넘다 보니 위험을 무릅쓰고 도전하는 ‘공격형 CEO’ 대신 사고 터지지 않게 관리에만 신경 쓰는 ‘수비형 CEO’가 양산된 것도 영향을 미쳤다.
경제계는 올해를 첨단기술 중심의 산업 재편이 본격화하는 해로 보고 있다. 생성형 AI, 온디바이스 AI 등 신기술 영역에서 ‘새로운 승자’가 등장할 수 있어서다. 이미 전쟁은 시작됐다. 구글은 작년 10월 오픈AI의 경쟁사인 앤스로픽에 20억달러를 투자했고 MS는 영국 AI 데이터센터 인프라에 32억달러를 넣었다.
경제계 관계자는 “2010년대 중반의 ‘잃어버린 10년’이 되풀이되지 않으려면 정부가 앞장서 ‘기업하기 좋은 환경’을 조성해줘야 한다”며 “첨단기술 분야에서 저만치 앞서나간 미국과 중국을 따라잡기 위해선 신속·과감한 의사결정이 가능한 오너 경영 시스템의 장점을 잘 살릴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황정수 기자 hjs@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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