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총무성은 2023년 신선식품을 제외한 소비자물가지수(CPI)가 전년보다 3.1% 올랐다고 19일 발표했다. 제2차 오일쇼크의 영향으로 물가가 급등한 1982년(3.1% 상승) 이후 가장 큰 상승폭이다. 식료품 가격은 8.2% 올라 1975년 이후 48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다. 지난 한 해에만 3만여 가지의 식료품 가격이 상승한 영향이다.
일본의 연간 물가상승률은 2022년(2.3%) 이후 2년 연속 일본은행의 물가 목표인 2%를 웃돌았다. 일본 정부는 올해도 물가가 2.5% 오를 것으로 내다봤다. 물가가 3년 연속 2% 넘게 상승한 것은 버블(거품)경제 막바지인 1989~1991년이 마지막이다.
지난달 물가상승률은 2.3%로 2개월 연속 오름폭이 줄었다. 2022년 6월 후 18개월 만에 가장 낮은 수준이지만 21개월 연속 2%를 웃돌았다. 일본 정부의 전기·가스요금 보조금 같은 물가 억제 대책이 없었다면 실제 물가상승률은 0.5%포인트 더 높았을 것으로 분석됐다. 정부의 전기·가스요금 보조금 효과가 줄어드는 다음달부터는 인플레이션 압력이 다시 거세질 것으로 예상된다.
물가 수준만 놓고 보면 일본은 이미 만성적인 디플레이션에서 벗어났다는 분석이 나온다. 일본은행이 조만간 ‘마이너스 금리’ 정책을 해제해 11년 만에 대규모 금융 완화를 중단할 것이란 전망이 힘을 얻는 이유다.
하지만 일본 정부는 좀처럼 디플레이션 탈출을 선언하지 못하고 있다. 임금 인상률에서 물가상승률을 뺀 실질임금이 주요 경제대국 가운데 유일하게 감소하고 있어서다.
반면 일본의 작년 실질임금은 2.6% 감소했다. 실질임금이 여섯 분기 연속 마이너스를 이어갔다. 이달 초 발표된 2023년 11월 실질임금도 -3.0%로 20개월 연속 감소세를 나타냈다.
일본을 제외한 주요국의 실질임금이 증가세로 전환한 것은 물가상승률이 정점을 지나는 가운데 임금이 꾸준히 올랐기 때문이다. 미국의 CPI 상승률은 2022년 2분기 8.6%를 정점으로 지난해 3분기 3.5%까지 둔화했다. 작년 3분기 미국의 명목 임금 인상률은 4.3%로 물가상승률을 웃돌았다.
영국과 독일의 인플레이션도 2022년 4분기 각각 9.4%, 8.6%로 최고치를 기록한 뒤 작년 3분기 6% 안팎으로 떨어졌다. 같은 기간 임금은 영국이 7.9%, 독일이 6.3% 올랐다.
일본의 물가상승률은 2022년 4분기 4.6%에서 작년 3분기 3.7%로 다소 떨어졌지만 임금은 0.9% 오르는 데 그쳤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일본의 인플레이션 압력이 다른 경제대국보다 약했지만 임금 인상률은 더 낮았다”고 설명했다.
물가가 계속해서 고공행진을 하는데도 임금이 따라서 오르지 않자 실질임금이 올해 증가세로 돌아설 것을 예상했던 전문가 가운데 전환 시점을 2025년으로 수정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일본 노무라종합연구소와 다이이치생명경제연구소는 적어도 2025년까지 일본 경제가 디플레이션을 벗어나지 못할 것으로 내다봤다.
사카이 사이스케 미즈호리서치&테크놀로지 수석이코노미스트는 “실질임금이 늘지 않으면 소비자는 지갑을 열지 않는다”며 “기업 매출도 증가하지 않아 투자와 임금을 적극적으로 늘리지 못하는 악순환에 빠진다”고 분석했다. 개인소비는 일본 국내총생산(GDP)의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
물가를 잡는 한편 경기가 다시 침체에 빠지는 것도 막아야 하는 일본은행으로서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 됐다는 분석이다. 대부분 전문가는 오는 23일 금융정책결정회의에서 일본은행이 기준금리를 동결하고 추세를 살필 것으로 예상했다.
도쿄=정영효 특파원 hugh@hankyung.com
관련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