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후장대 기업들이 자꾸만 힙해지려는 이유 [긱스]

입력 2024-01-21 10:08   수정 2024-01-21 10:13

포스코가 내놓은 ‘판타스틸 왕국’이라는 광고 보셨나요? 포스코의 제철기술로 악의 무리를 물리치고 지속가능한 세상을 만들어간다는 내용입니다. 올드하고 딱딱한 이미지였던 중후장대 기업이 젊은층을 겨냥해 '힙한 광고'를 내놓은 겁니다. 중후장대 기업들은 왜 이미지 변신을 시도하려고 할까요. 김태호 유비쿼스인베스트먼트 팀장이 한경 긱스(Geeks)에서 전합니다.



‘철멍’이라는 말 들어보셨나요? 불이 타오르는 광경을 멍하니 지켜보는 것을 뜻하는 ‘불멍’처럼 쇳물이 녹아 철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지켜보는 말이라고 합니다. 현대제철 공식 SNS 채널에는 이 ‘철멍주의’ 시리즈가 게재되어 있습니다. 유니크한 캐릭터들이 철을 만드는 과정을 반복적으로 보여주는 애니메이션인데 가만히 보다보면 ‘편안해진다’는 평이 많습니다.

현대제철은 국내 대표적인 중후장대(重厚長大) 기업입니다. 중후장대란 무겁고, 두텁고, 길고, 큰 것을 의미하죠. 철강, 화학, 자동차, 조선이 대표적인 중후장대 산업입니다. 우리 경제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지만 거대한 공장과 낡은 굴뚝의 이미지가 먼저 떠오르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런데 요즘 중후장대 기업들의 마케팅을 보면 이른바 ‘힙하다’는 표현이 어울립니다.

포스코는 최근 ‘판타스틸 왕국’이라는 광고로 광고계를 뒤집어 놓았습니다. 포스코의 제철기술을 전수받아 악의 무리를 물리치고 지속가능한 미래세상을 만들어간다는 내용의 광고입니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조회수가 총 6,000만뷰가 넘을 정도로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정유회사인 HD현대오일뱅크가 공개한 웹드라마 ‘102호 학습실 그녀’도 인기 콘텐츠 입니다. 옥탄가 102의 고급휘발유를 홍보하기 위한 영상인데 주인공들의 이름부터 독특합니다. 마세라, 제네스, 남보르와 같이 고급차 브랜드를 떠올리게 하는 이름들입니다. B급 감성 콘텐츠지만 젊은 층들에게 인기가 많았다고 합니다.

올드하고 딱딱한 이미지였던 중후장대 기업들이 B급 감성 마케팅을 한다? 뭔가 변화가 감지되는 대목입니다. 왜일까요? 이 산업들에는 젊어져야만 하는 필연적인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놈의 ‘탄소’
중후장대 기업들의 공통점은 제품 생산과정에서 많은 탄소를 배출한다는 점입니다. 전 세계가 탄소중립을 외치고 있으며, 이에 따른 규제는 점차 강화되고 있습니다. 유럽연합(EU)에서는 탄소국경조정제도(CBAM)를 통해 탄소배출량이 많은 국가에서 생산 및 수입되는 제품에 추가 관세를 부과할 예정이며 내년부터는 본격적으로 이 제도가 시행됩니다.

우리나라 정부도 2050 탄소중립 사회로 전환을 위해 2030년 온실가스 배출량을 2018년 대비 40% 감축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습니다.

중후장대 기업들은 이같은 큰 흐름에서 규제의 화살을 피하기 힘듭니다. EU의 탄소국경조정제도를 적용받는 산업은 철강, 전력, 비료, 알루미늄, 시멘트, 유기화학품 등으로 대부분이 중후장대 산업입니다. 실제 철강 산업의 경우 탄소배출량이 압도적으로 타 산업대비 많습니다. 연간 이산화탄소 배출량이 1억톤을 넘습니다. 석유화학 산업들이 그 뒤를 잇고 있죠.

중후장대 중 운송수단으로 분류되는 조선업과 자동차 산업도 탄소배출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조선업의 경우 국제해사기구(IMO)의 규제를 강하게 받습니다. 국제해사기구는 최근 2050년 해운업계에서 발생하는 탄소 순배출량 ‘Zero’를 목표로 제시하고 연도별 감축 계획안을 채택했습니다. 배의 건조부터 운행에 이르기까지 모든 온실가스 배출을 규제하겠다는 것이 주된 내용입니다. 소비자 접점이 큰 자동차 산업은 이미 각국에서 강한 규제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미국은 2032년까지 판매 승용차 67%를 전기차로 대체하기로 했습니다. 이에 디젤엔진 생산을 중단하는 자동차 기업들도 늘어나고 있죠.
신기술로 무장하는 중후장대
포스코의 ‘판타스틸 왕국’이나 HD현대오일뱅크의 ‘102호 학습실 그녀’가 담고 있는 내용도 자세히 살펴보면 ‘탄소중립’과 연관성이 짙습니다. 판타스틸 왕국 2편은 전쟁으로 폐허가 된 세상을 친환경 제철 기술로 복원한다는 내용이죠. ‘우리는 친환경 제품을 생산한다’는 메시지를 광고에 담아 ESG적인 이미지를 강화해나가는 전략으로 해석됩니다.

실제 사업은 어떨까요? 탄소배출 1위 산업인 철강회사들은 실제 친환경 제철 기술 확보를 위해 노력 중입니다. 여기에 사용되는 기술이 수소환원제철(HyREX, Hydrogen Reduction)입니다. 환원제로 석탄 대신 수소를 활용해 탄소발생을 차단하는 기술입니다. 수소환원제철 기술이 사용되면 제철소의 상징과도 같던 고로(용광로)가 사라지고 그 자리를 전기로가 대체합니다. 철 생산 과정에서 나오는 부산물은 탄소가 아니라 물이 되기 때문에 탄소배출을 크게 줄일 수 있습니다.

석유화학산업도 연료전환 시대를 대비하고 있습니다. 석유를 중심으로 한 모빌리티 동력원 체계가 전기로 바뀌고 있기 때문이죠. 석유를 대체할 수 있는 에너지원인 수소기술 확보와 바이오연료 개발, 폐플라스틱 연료화 등의 기술이 미래 먹거리가 될 수 있습니다. 정유회사의 경우 주유소를 하나의 문화복합 전기 충전 공간으로 바꾸는 계획들도 내놓고 있습니다. 전기차 시대에는 주유소가 태양광 발전, 연료전지 등과 복합된 슈퍼 에너지 스테이션으로 바뀔 수 있습니다.

철강과 석유화학업계가 함께 관심을 가지는 기술 중에는 CCUS(탄소포집사용저장)와 수소생산도 있습니다. CCUS는 생산과정에서 배출되는 이산화탄소를 포집해 저장하고, 재활용하는 기술입니다. 철강과 석유화학 제품 생산과정에서 나오는 이산화탄소를 포집해 식물성장이나 수소생산 등에 활용할 수 있다면 사실상 탄소배출 제로가 가능해집니다. 한국에너지기술연구원에 따르면 전 세계 CCUS 시장 규모는 2025년 35억4,230만달러를 형성할 것으로 예측됩니다.

자동차산업은 이미 빠르게 친환경 산업으로 전환되고 있습니다. 글로벌 시장에서 많은 자동차 브랜드들이 디젤엔진 대신 하이브리드와 전기차 기술 확보에 몰두하고 있으며, 소비자들의 선택도 조금씩 늘어나고 있습니다. 차량 간 커뮤니케이션이 가능한 V2X(vehicle to everything) 기술, 자율주행 등의 첨단 기술도 광범위한 측면에서는 에너지 효율을 향상시키고 배기가스량을 줄이는 효과를 가져 옵니다. 이 때문에 하드웨어 중심의 자동차산업이 점차 소프트웨어 중심으로 변화하는 것도 하나의 트렌드입니다. 인공지능(AI), 빅데이터 등의 빅데크적 요소도 자동차산업이 갖춰야할 기술이죠.

조선업의 연료전환도 시급한 과제입니다. 선박 운송의 탄소제로를 위해서는 우선 선박 자체가 화석연료 사용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국제해사기구 규제로 해당 산업은 당장 발등에 불이 떨어진 상태입니다. 해양수산부 자료에 따르면 국제해사기구의 선박에너지효율지수(EEXI) 규제를 충족하지 못하는 선박은 한국 국적선 기준 72.4%에 달합니다.

현재 기존연료 대체제로 천연가스(LNG), 메탄올, 암모니아, 수소 등이 거론되고 있습니다. 선박의 연료가 변경되면 엔진의 구조와 선박 설계가 크게 달라집니다. 업계에서는 100% 탄소 절감을 위해서는 장기적으로 수소 추진시스템으로 선박들이 전환돼야 한다고 입을 모읍니다. 선박용 연료전지, 안전시스템, 배터리효율화 시스템 등 수소 추진선 전환을 위한 기술개발이 해당 산업의 지속가능성을 담보할 열쇠입니다.
해법은 ‘오픈이노베이션’
‘탈탄소’를 위한 기술확보와 사업전환은 하루아침에 이뤄지지 않습니다. 많은 시행착오를 거쳐야하고 기술표준이 확립되기까지 꾸준한 대규모 투자가 이뤄져야 합니다.

많은 중후장대 기업들이 젊어지고, 변화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내부의 변화도 중요하지만 빠르게 변하는 트렌드에 민감하게 반응하기 위해 외부와의 협업이 활발합니다. 그동안 경쟁을 해왔던 경쟁업체와 손을 잡거나, 스타트업 협업 및 투자로 해법을 찾고 있죠. 외부로부터의 혁신 ‘오픈이노베이션’입니다.

현대차는 꾸준히 스타트업에 투자하며 산업전환의 기틀을 마련하고 있습니다. 2017년부터 지난해 1분기까지 투자한 스타트업은 200여개 이상으로 투자총액은 약 1조3,000억원에 달합니다. 미국의 양자컴퓨팅 업체 ‘아이온큐’ 등이 대표적이며 배터리 기술 고도화를 위해 공동연구를 진행 중이라고 합니다. 2022년에는 자율주행 스타트업 포티투닷을 인수하기도 했죠.

포스코는 친환경 제철기업 전환 로드맵을 제시하고 에너지 효율개선, CCUS, 수소환원제철 기술 등의 기술을 확보해 나가고 있습니다. 서울창업허브와 연계한 스타트업 ‘아이디어 마켓’ 행사를 열어 스타트업을 발굴하고 투자까지 병행 중입니다. 계열사들도 각각 친환경 스타트업들과 협업이 활발합니다. 대표적으로 포스코모빌리티솔루션의 경우 수소추진선박에 활용되는 추진시스템 개발을 위해 스타트업 빈센과 MOU를 체결한 바 있습니다.

조선업에서는 한국조선해양이 해양 미래기술분야 스타트업 육성사업을 진행하고 있으며, 선박에너지효율 개선 등의 기술을 확보한 스타트업의 성장을 돕고 있습니다.

롯데케미칼, GS에너지 등의 석유화학기업들도 꾸준히 오픈이노베이션 프로그램을 운영하며 스타트업과의 협업을 확대하고 있습니다. GS에너지의 경우 지난해 전기차 충전업체 차지비를 인수해 주유소의 충전소 전환을 시도하고 있죠.

중후장대 기업들의 이같은 변화는 세계 최대 가전전시회 CES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과거 CES는 IT기업이나 가전기업들이 신기술을 선보이던 자리였습니다. 하지만 수년 전부터 중후장대 기업들이 CES에 등장하기 시작했고 이제는 주인공으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올해 역시 이들이 선보인 친환경 미래기술들에 많은 이목이 집중됐죠.

중후장대 기업들은 우리나라 경제의 근간입니다. 제조업이 첨단산업으로 부활하는 것은 국가 경쟁력 강화에도 매우 중요한 과제입니다. 하지만 기존의 방식을 버리고 새롭게 거듭나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죠. 중후장대 기업들의 힙한 SNS 광고도 어쩌면 이런 절박함에서 나온 새로운 변화일지도 모르겠습니다. <hr style="display:block !important; border:1px solid #c3c3c3" />

김태호 | 유비쿼스인베스트먼트 투자본부 팀장

신기술사업금융전문회사인 유비쿼스인베스트먼트에서 스타트업 투자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다양한 산업 영역에서 일어나는 혁신을 관찰하고, 이를 주도하는 스타트업을 발굴해 성장 마중물을 공급합니다. 그래서 매일 스타트업을 만나 혁신적인 트렌드에 대해 이야기 나누는 일이 즐겁습니다. 한국경제신문에서는 벤처캐피털의 투자와 스타트업의 성장 스토리에 대한 기사를 썼습니다. 여러 경험에서 쌓은 넓고 얕은 지식이지만 스타트업 성장에 조금이나마 도움을 주기위해 매일 노력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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