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자가 태어나 집에 오자 아버지는 바빴다. 동쪽으로 머리를 두고 잠자는 동침(東枕)을 고집했다. 아버지는 창과 벽 사이로 스며드는 웃풍이 심하자 머리맡에 둘러칠 머리 병풍(頭屛風)을 만들었다. 흔히 가리개라 부르는 침병(枕屛)은 대개 두 폭이다. 미뤄뒀던 일이라며 방 귀퉁이에 한동안 밀쳐둔 종이상자를 풀었다. 목공소에 진즉에 주문한 홍송(紅松) 병풍 틀을 만드는 나무가 가득 들어있었다. 끌로 파고 사포로 문질러 결대로 짜 넣는 데만 며칠 걸렸다. 아버지는 “배접(褙接)은 왜놈들 용어”라며 다시 며칠 걸려 두 번에 걸쳐 배첩(褙貼)했다. 밀가루로 풀을 쑤고 녹말을 완전히 내린 후 말려서 가루로 두었다가 묽게 쑤어 풀을 만들었다. 그렇게 만든 풀로 삼베로 병풍 기둥을 싼 뒤 비단으로 다시 싸 돌쩌귀로 붙여 연결했다.
곁눈으로 지켜만 봐도 정성이 느껴졌다. 며칠 동안 매달리던 아버지가 불렀다. 종이를 잘라 놓고 기다리던 아버지는 먹을 갈아달라고 했다. 더는 말하지 않고 한 번에 써 내려간 시가 주희(朱熹)의 ‘관서유감(觀書有感)’이다. 주희가 책을 읽다 든 생각을 쓴 시다. “작은 사각 연못에는 큰 거울이 펼쳐지니 하늘빛과 구름 그림자가 그 안에 일렁인다. 묻노니 이 연못은 어찌 이리도 맑을까. 발원지에서 쉬지 않고 새 물이 흘러들기 때문이지[半畝方塘一鑑開 天光雲影共徘徊 問渠那得淸如許 爲有源頭活水來].” 시는 두 편이다. 저 시는 첫 편이다. 아버지는 행서체로 두 연을 한 폭씩 썼다. 그래서 병풍은 모두 네 폭이 됐다.
며칠 뒤 아버지는 작품을 배첩한 뒤 외선을 둘러 병풍을 마무리했다. 붙인 병풍 제목이 고사성어 ‘원두활수(源頭活水)’다. 아버지는 “내 좌우명이다”라고 했다. 주자(朱子)의 첫 시 마지막 연에 나오는 글을 축약한 성어다. 수원지에서 맑은 물이 솟아나는 것처럼 사람도 부단하게 지식을 쌓아 새롭게 발전해야 하는 것을 비유한 시다. “반 뙈기 작은 연못 깊은 곳에서 살아있는 맑은 물이 끝없이 솟아 나와 결국 가장 크고 아름다운 것들(하늘빛, 구름 그림자)을 자기 속에 품은 모습이 구도자의 숭고한 경지를 잘 비유했다”라고 극찬한 아버지는 “끊임없이 솟는 샘에서 흘러온 새 물 때문에 연못이 맑게 유지될 수 있는 것처럼 사람도 끊임없이 배움을 통해 자신을 변화?발전시켜야 한다”라고 설명을 보탰다. 이어 “이 뜻에 감흥을 받은 훗날의 학자들은 자신의 연못을 네모지게 만들고, 시구는 옆에 두고 자주 읽고, 서예가들은 즐겨 쓰고 있다”는 말을 덧붙였다.
“연못에 새 물이 들어오면 내 정신도 맑고 참신하고 넉넉해진다”라고 감상한 아버지는 “너를 낳고 자그마치 38년이나 기다려 얻은 새 물이 우리집에 들어왔다. 새 물이 연못을 살린다. 없던 용기도 북돋아 주니 큰 복이 아닐 수 없다. 손주가 주는 효과를 톡톡히 봤다”라고 손자가 태어난 기쁨을 표현했다. 이어 아버지는 “네 할아버지는 네 큰아버지 아들인 손자가 태어났을 때 침병을 만드셨다. 그때 병풍 만드는 심부름을 했던 기억을 더듬어 오늘 침병을 살려냈다”라고 했다. 아버지는 침병을 펼쳤다 접었다 하면서 당신의 아버지가 첫 손주를 얻었을 때 느꼈을 감흥을 읽어내려고 애쓰며 “이제야 내 아버지의 뜻을 이었다”라며 의미를 두었다.
아버지는 “가둬놓은 물은 반드시 썩는다. 그러면 모두 죽는다. 그걸 살려내는 게 새 물이다”라며 연못에 새 물이 들어와야 하는 이유를 설명했다. “옛 어른들도 그 뜻을 새기기 위해 연못을 만들었다. 창덕궁 희정당(熙政堂) 옆 하월지(荷月池)도 그렇고, 강릉에 있는 선교장(船橋莊)의 활래정(活來亭)도 주희의 저 시에서 따와 뜻을 새겨 만든 거다”라고 일러줬다. 이 글을 쓰며 찾아가 보니 건국대 일감호(一鑑湖)는 한강 물이 들어오게 설계돼 있었다. “회사도 마찬가지다. 성장하고 발전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새로운 인재가 필요하다”면서 그 이유는 새 물이 지닌 잠재력 때문이라고 했다.
아버지는 그러나 잠재력을 지닌 새 물도 잘 가꾸어야 손주에게 복이 된다며 교육을 강조했다. 이어 “네 고조부가 손자인 네 조부를 가르친 격대교육(隔代敎育)은 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늦게 얻은 손주일수록 조부모의 기대감이 아비보다 크다”면서 “세상이 워낙 많이 달라졌다. 자칫 큰 기대감이 큰 갈등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큰 기대가 옹졸함을 부르기 때문이다”라고 주의하라며 포용성을 가지기를 당부했다. 그 또한 손주들에게도 물려줘야 할 소중한 인성이다.
<한경닷컴 The Lifeist> 조성권 국민대 경영대학원 객원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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