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는 빈 필하모닉과 ‘세계 최고 악단’ 타이틀을 두고 다투는 명문 악단이다. 이런 오케스트라에서 전체 악기군의 장(長)을 뜻하는 ‘악장’ 자리에 앉는 것은 그야말로 하늘의 별 따기만큼 힘들다. 베를린 필은 음색, 기교, 리듬감, 앙상블 역량 등 연주력을 가늠할 수 있는 모든 측면에서 깐깐한 심사를 거쳐 최적의 바이올리니스트를 악장으로 선발한다. 그래서 ‘베를린 필 악장’이라고 하면 그 외의 다른 수식어가 구태여 필요하지 않다.
하지만 2009년부터 베를린 필 악장 자리를 지켜온 영국 태생의 일본계 바이올리니스트 다이신 가시모토(45·사진)를 그 정도로만 안다면 절반만 아는 셈이다. ‘국제적 명성의 전문 솔리스트’ 못지않은 독주 실력으로 정평이 난 인물이라서다. 2013년 사이먼 래틀이 이끄는 베를린 필의 협연자로 발탁됐고, 2022년엔 파비오 루이지 지휘의 달라스 심포니와 협연한 데 이어 지난해엔 베를린 필(파보 예르비 지휘)의 도시오 호소카와 바이올린 협주곡 ‘기도’ 세계 초연 무대에 당당히 솔리스트로 올랐을 정도다.
이번 공연에서 가시모토는 프랑스 피아니스트 에릭 르 사주(60)와 함께 브람스의 바이올린 소나타 1번, 슈만·브람스·디트리히의 ‘F.A.E 소나타’, 클라라 슈만 ‘3개의 로망스’, 로베르트 슈만의 바이올린 소나타 2번을 들려준다. 그는 “우리의 공연엔 ‘에피타이저’ 따위는 없다”고 했다. “로망스가 그나마 청중에게 숨 쉴 틈을 주겠지만, 그마저도 힘들 겁니다. 모든 작품이 아주 무겁고 강렬한 악상을 내뿜거든요.”
그는 “끈끈한 사제지간이었던 슈만과 브람스의 삶을 음악으로 들려주고 싶었다”고 했다. “두 작곡가 사이엔 사랑과 경쟁, 질투, 존경 등 다양한 감정이 자리하고 있어요. 수많은 음악적 영감을 주고받으면서 서로의 작품 세계에 깊은 영향을 미쳤죠. 상당히 유사한 점이 많으면서도 근본적으론 완전히 다른 이들의 음악을 깊이 파고들어 청중에게 한 편의 영화를 본 듯한 짙은 여운과 인상을 남기고 싶습니다.”
“사실 살면서 ‘악장이 되겠다’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어요. 지인이자 베를린 필 전임 악장인 가이 브라운슈타인의 권유로 오디션을 봤고, 이후 제 인생이 완전히 바뀌었죠. 베를린 필 악장으로의 경험이 제 음악적 역량을 크게 끌어올렸다고 생각해요.”
바이올리니스트로서의 그의 궁극적인 목표는 무엇일까. “최종 목적지는 정하고 싶지 않아요. 음악가로서 마침표를 찍는 건 생각하고 싶지도 않거든요. 하나 바랄 수 있다면 매 순간 온 힘을 다해 연주하고, 청중에게 늘 확신에 찬 음악을 들려드리고 싶습니다. 그러면 언젠가 제 연주를 통해 작곡가의 목소리가 생생히 전달되고, 솔직한 제 감정이 그대로 전해지는 날이 오지 않을까요. 제게 그것보다 더 멋진 일은 없을 겁니다.”
김수현 기자 ksoohyu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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