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달 12일 이복현 금융감독원장은 기다렸다는 듯 부동산 PF사업장 관련 ‘자기책임 원칙’과 ‘옥석 가리기’를 들고 나왔다. 정부가 오는 4월 총선까지 PF 부실을 덮고 갈 것이라던 시장의 예상이 뒤집어진 것이다. 부도에 내몰린 태영건설은 결국 지난달 28일 워크아웃을 신청했다.
시험대에 오른 태영건설을 워크아웃 판으로 끌어들인 이유는 법정관리를 선택했을 경우의 파장 때문이다. 태영건설이 법정관리로 가면 건설현장은 멈추고 모든 채권은 동결된다. 수분양자는 입주가 늦어지고, 협력업체의 돈줄까지 막힌다. 국내 부동산 시장 전체의 자금 경색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얘기다.
태영그룹 오너일가 입장에선 태영건설만 법정관리로 보내 버리면 SBS 등 다른 계열사는 지킬 수 있었다. 금융당국과 채권단이 태영그룹 측과 팽팽한 줄다리기를 벌인 이유다. 정부가 “남의 뼈가 아니라 자기 뼈를 깎으라”고 몰아붙인 뒤에야 태영그룹은 백기 투항했다.
태영건설이 공사 중인 아파트를 분양받은 가구는 1만9869가구다. 진행 중인 공사는 140건에 달한다. 협력업체 수는 581개 사로 집계됐다. 태영건설이 보증을 선 PF사업장은 122개에 이른다. 당초 9조원대로 알려진 보증 규모는 추가 실사를 통해 20조4000억원에 이르는 것으로 파악됐다.
건설사(시공사)는 PF사업장의 자금 조달 채무에 보증을 서고 공사를 따내는 방식의 영업을 하는 경우가 많다. 태영건설은 이런 사업을 너무 많이 벌인 게 화근이 됐다. 태영건설에 돈을 빌려준 채권 금융사는 총 80곳. 각 PF사업장에 돈을 빌려준 대주를 합하면 채권자 수만 600곳이 넘는다. 직접 채권자가 PF사업장 대주인 사례도 많다. 한 PF사업장의 선순위 대주가 다른 사업장에선 후순위가 되기도 한다. 수많은 이해관계가 얽혀 있다는 얘기다.
건설사 워크아웃의 특징은 해당 회사 뿐만 아니라 관련 PF사업장들도 워크아웃에 준하는 절차를 밟게 된다는 점이다. 국내 모든 금융사가 참여한 PF대주단협의회 운영협약(PF대주단 협약)에 규정된 ‘공동관리절차’를 따라야 한다. 공동관리절차를 운영하는 게 PF대주단이다. 대주단은 채권 행사 유예, 사업 정상화 특별약정 체결, PF사업장 보유자산 매각, 신규 자금 투입 등을 결정한다.
그런 측면에서 이번 태영건설 워크아웃에 얽힌 다양한 채권자 간 이해관계가 어떻게 풀려갈지 업계의 이목이 쏠리고 있다. 한 채권단 관계자는 “모두 협조하면 손실을 일정 부분 분담하고 마무리할 수 있다”며 “하지만 배신자가 나오는 순간 모두 큰 손실을 보는 ‘죄수의 딜레마’ 게임이 시작된 셈”이라고 분석했다.
문제는 태영건설 워크아웃이나 각 PF사업장의 정리 과정에서 예상치 못한 손실이 발생하는 경우다. 워크아웃이나 공동관리절차에서 이탈하는 채권자(대주)가 발생할 수 있어서다. 워크아웃 동의를 철회해도 기업구조조정촉진법상 2000만원 이하의 과징금 외엔 명확한 제재 수단이 없다. 이탈 채권자가 25%를 넘어서면 태영건설이나 개별 PF사업장이 법정관리로 가게 된다. 유례없는 대규모 빚잔치(청산)가 벌어질 수 있다.
전국 3000여 개 PF사업장 가운데 실제 대주단을 구성하고 구조조정에 들어간 현장은 작년 8월 말 기준 187개에 그친다. 금융위는 8월 말 이후 현황을 공개하지 않고 있다. 상당수 PF사업장은 이해관계자의 입장이 엇갈리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처지에 놓여 있다. 채권 금융사의 손실 확정 우려, PF사업장을 운영하는 시행사의 상황 호전 기대 등으로 만기만 연장하는 사업장이 부지기수다.
사업성 낮은 PF의 자산을 매입해 재구조화한다는 목적으로 출범한 한국자산관리공사(캠코)의 PF지원 펀드는 지난해 10월 조성 이후 매입 실적이 단 한 건에 그쳤다. 캠코 관계자는 “토지 매입 가격보다 싸게 넘기겠다는 PF사업장이나 대주단은 사실상 거의 없다”고 말했다. 시장 참가자들이 일정 부분 손실을 감수하겠다고 각오하지 않는 이상 ‘부실의 이연’은 지속될 수밖에 없다는 지적이다.
강현우 기자 hka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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