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인들에게는 대규모 정전에 대한 악몽이 여럿 있다. 2021년 2월 텍사스주는 중대재난지역으로 선포될 정도의 대형 정전 사태를 겪었다. 삼성전자 오스틴 공장도 이때 나흘간 지속된 정전으로 4000억원의 피해를 봤다. 2020년 캘리포니아주 정전은 지역 에너지 정책의 변화를 가져온 계기가 됐다. 전력의 30%를 변동성이 큰 태양광·풍력 등 신재생에너지에 의존하면서도 예비전력 시스템을 제대로 갖추진 못한 것이 사태의 주요 원인으로 지목됐다. 캘리포니아주는 우크라이나 전쟁까지 겹치자 당초 2025년 폐쇄하기로 한 디아블로 캐니언 원전을 2030년까지 연장 운영하기로 작년 말 결정했다.
인공지능(AI) 시대는 전기의 중요성을 일깨우는 역사적 모멘텀이 되고 있다. AI로 전기 수요가 폭증하는 이유는 크게 세 가지다. 자연어 처리를 위해 1750억 개의 파라미터(매개변수)를 가진 GPT-3 모델을 한 번 학습시키는 데 1.3기가와트시(GWh)의 전력이 들어간다. 한국 전체에서 1분간 소비되는 전력량 규모다. 검색에 쓰이는 전기량도 AI가 일반 검색보다 5배나 많다. 무엇보다 AI를 ‘전기 먹는 하마’로 만드는 것은 데이터센터(IDC)다. 생성형 AI는 IDC 서버 용량도 급증하는데, 이때 서버 열을 식히는 냉각 시스템에 엄청난 전력이 소요된다.
AI 생태계도 온통 전기로 움직인다. AI 반도체 공정도, AI와 연동될 전기자동차도 다 그렇다. AI의 전력 소모가 예상보다 커 2050년쯤엔 지금보다 1000배의 전기가 더 필요할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오픈 AI 창업자 샘 올트먼과 MS 창업자 빌 게이츠가 핵분열 원전보다 진화한 핵융합 발전이나 소형모듈원전(SMR) 같은 도전적 기술 개척에 뛰어든 것도 ‘전기를 쥔 자가 살아남는다’는 AI 시대 생존 논리를 꿰뚫어봐서다.
전기는 이제 탄소를 배출하지 않는 원전과 신재생에너지 등에서만 의미를 갖는다. 신재생에너지는 많은 매력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주력으로 삼기에는 현실적 한계가 명확하다.
네이처에 실린 세계 주요 42개국의 태양광·풍력 안정성 비교 연구 결과를 보면, 한국의 입지 조건은 예상대로 꼴찌다. 우리가 러시아 캐나다 호주 미국 중국 수준의 신재생에너지 효율·안정성을 갖기 위해선 막대한 에너지저장장치(ESS) 투자가 필수적인데, 추정 비용은 1200조~1800조원으로 가히 천문학적이다.
신재생에너지가 아무리 멋진 덩크슛이더라도 단신인 우리는 원전이라는 3점 슛을 무기로 삼을 수밖에 없다. 임기 말 문재인 전 대통령마저 향후 60년간 주력 기저 전원일 수밖에 없다고 인정한 원전을 메인으로 삼고, 신재생에너지 비중을 함께 끌어 올리는 에너지 믹스 외에는 대안이 없다.
원전 비중 확대를 위해선 세 가지 급선무가 있다. 신규 원전 부지 확보는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의 당면 1호 과제가 돼야 한다. 고준위 방사성폐기물 처분시설(방폐장)이 없는 한 원전은 ‘화장실 없는 아파트’ 격이다. 원전 상위 10개국 중 방폐장 설립 절차에 착수하지 못한 나라는 한국뿐이다. 전기 생산만큼 중요한 게 전기를 수요처에 보내는 일이다. 송전선로 건설 기간의 획기적 단축을 위해 추진하고 있는 국가 전력망 특별법 제정도 시급하다. 대부분 야당의 협조가 필요한 사안이다.
에너지 정책은 이념이 아니라 현실과 과학에 기반해야 한다는 평범한 진리를 깨닫는 데 전 정부 5년의 시간이 들었다. 우리에게는 1948년 북한의 5·14 단전으로 미국의 발전함을 부산항과 인천항에 들여와 비상 전력으로 쓰던 비참한 과거가 있다. 오늘날 남북한 야경 사진을 흑백으로 대조시킨 계기는 1978년 고리 원전 1호기 가동으로 만들어졌다. 예나 지금이나 미래도 발전(發展)은 발전(發電)위에서 가능하다.
관련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