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하기 바쁜데, 중대…뭐요?" 영세 축가공업체 '날벼락'

입력 2024-01-25 18:17   수정 2024-02-01 15:57


“칼질하기도 바쁜데 어떻게 안전관리 기준을 다 맞춥니까. 안전관리자는 고사하고 안전교육을 받은 사람도 없는데….”

25일 서울 마장동 축산시장에서 만난 D축산 대표는 확대 시행이 결정된 중대재해처벌법에 대해 “아무 준비가 돼 있지 않다”며 “날벼락을 맞은 꼴”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다들 베테랑 직원이지만 날카로운 칼이나 쇠톱 등을 다루다 까딱하면 사고가 날 수 있다”며 “상처가 깊으면 내가 구속될 수도 있다는데 그럼 곧장 폐업하라는 얘기 아니냐”고 분통을 터뜨렸다. 인근 G축산 대표는 “도축하랴, 손님 맞으랴 종일 정신없는데 10개 넘는 안전 관련 서류를 어떻게 작성하라는 건지 막막하다”고 하소연했다.

5인 이상 50인 미만 사업장에 대한 중대재해법 시행을 2년간 유예해달라는 중소기업계의 호소를 야당이 이날 끝내 거부하면서 산업현장 혼란이 본격화할 조짐이다. 상당수 영세 기업과 식당·PC방 등을 운영하는 소상공인은 법 적용 대상에 포함됐는지조차 모르는 경우가 많아 억울한 사례가 속출할 것이란 우려도 크다.
○“작성할 서류만 산더미”
사장이나 대표가 영업과 생산, 안전관리까지 도맡아야 하는 영세 중소기업과 소상공인들은 까다로운 서류 작성 등 각종 의무 사항을 이행하기 어렵다고 입을 모은다. 중대재해 사고가 발생하면 관할 고용노동청의 조사가 시작된다. 사고 현장 점검은 물론 안전 점검 관련 서류를 모두 조사하게 된다. 서정헌 중소기업중앙회 인력정책실장은 “처벌 기준이 되는 경영진의 사고 예방 노력은 결국 서류 점검으로 확인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중대재해법에 따르면 ‘위험성 평가’를 비롯해 ‘중대산업재해 대비 매뉴얼 마련’ 등 10여 개의 서류를 작성해야 한다. 중소기업계는 이런 서류작업을 담당할 직원을 지정하는 일도 버거운 형편이라고 토로한다. 경기 안산의 소규모 제조업체 관계자는 “솔직히 공장에서 일하는 인력은 대부분 현장 직원인 데다 학력 수준이 높은 편이 아니어서 서류 작성 업무를 맡길 사람이 없다”며 “이런 현실을 알고도 법을 적용하겠다는 것이냐”고 비판했다.

건물 기둥 사전 제작업체 관계자는 “이미 중대재해법 적용을 받고 있는 50인 이상 업체도 현장에 있어야 할 안전관리 요원이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서류만 만지고 있다”며 “과도한 ‘페이퍼 워크’ 부담을 주면서 사고를 줄이라는 건 난센스에 가깝다”고 지적했다.
○정부 대응 부족도 문제
27일부터 중대재해법이 적용될 5인 이상 50인 미만 사업장은 83만7120개에 이른다. 이미 법이 적용되고 있는 50인 이상 사업장(8만9000여 개)의 10배에 달하는데도 정부 지원책은 미흡하다는 평가가 나온다. 안전관리 자격자를 채용하기 어려운 소규모 사업장의 안전관리 역량을 강화하겠다는 취지로 마련된 공동안전관리자 지원 제도가 대표적이다. 각 업종과 지역 산업단지의 중소기업을 묶어 공동 관리하는 방식이다. 한 중소기업 컨설팅업체 대표는 “공동안전관리자를 위한 예산은 편성돼 있지만 관련 인력 부족에 안전관리자 모집도 아직 안 된 상황”이라며 “법 확대 시행이 코앞인데 중소기업이 혜택을 보려면 몇 달 기다려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지난해 2월부터 시작된 안전보건관리체계 구축 컨설팅을 진행한 사업장도 채 2만 개를 넘지 않는 데다 컨설팅의 수준도 기대 이하라는 게 업계의 중론이다. 한 제조업체 관계자는 “무상으로 컨설팅을 해준다고 해서 받아봤는데 형편없는 수준이었다”며 “이런 식의 요식행위로 안전사고가 줄지 의문”이라고 지적했다.

이정선 중기선임기자/김동주 기자 leeway@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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