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미로운 점은 ‘보헴시가’의 매출 구조다. 최대 담배 유통 채널인 편의점에선 보헴 시가 시리즈를 찾기 힘들다. 편의점 A사에 따르면 26일 기준 약 15종의 보헴시가 중 그나마 매출 순위가 높은 제품은 ‘보헴시가슬핌핏브라운’으로 19위다. 그다음 순위는 50위와 62등이다. A사 관계자는 “전자담배의 판매 비중이 높아지면서 보헴 시가 시리즈처럼 타르 비중이 높은 연초 제품은 잘 안 나가는 편”이라고 말했다.
실제 PX에서 판매되는 담배 13종 중 12종(에쎄 4, 레종 3, 보헴시가 4, 렘브르기니 1)이 KT&G 제품이다. 나머지 하나는 필립모리스인터내셔날의 ‘말보로골드’다. 에쎄 시리즈는 A 편의점에서도 매출 1, 2위(에쎄체인지 1㎎, 에쎄프라임 4㎎)를 차지하고 있는 인기 제품이니 이해할만하다.
하지만 보헴시가를 4종이나 PX 진열대에 올려놓은 것은 담배업계에서도 ‘현실’에 맞지 않다는 지적이 나온다. KT&G가 의무복무 장병의 주머니를 털어 한물간 제품을 사실상 강매하는 것 아니냐는 비판까지 제기되고 있다.
KT&G는 국내 담배 제조·유통을 사실상 독점하고 있는 1위 기업이다. 동시에 해외 135개국(2022년 말 기준)에 제품을 수출하는 글로벌 5위의 상장사다. 2001년 민영화 이후 공기업 타이틀을 떼면서 국내외 연기금이 패시브 펀드를 통해 KT&G 지분을 보유하고 있다. 공정한 경쟁과 투명한 경영이라는 시장경제의 규칙을 누구보다 철저히 지켜야 한다는 얘기다. 불공정과 불투명은 자칫 회사의 위기로 비화할 수 있어서다.
예컨대 고속도로 휴게소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2020년까지 전국 250여 개 고속도로 휴게소 중 약 180여 개 휴게소는 KT&G 제품만 판매하고 있던 것으로 조사됐다. KT&G는 소비자 불만이 크다는 지적에 따라 2015년에 공정거래위원회로부터 시정명령과 함께 25억원의 과징금을 부과받았지만, 상황을 개선하는 데에 별다른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 있다.
불법과 편법의 경계선상에서 오랫동안 진행돼 온 KT&G의 이 같은 경영 방식은 ‘1.5조원 규모의 미국 에스크로(공탁금) 몰취 위기’에서도 한계를 노출하고 있다. KT&G가 경영상 중대 실책으로 미 법무부와 식품의약국(FDA) 조사를 받고 있고, 이로 인해 미 주 정부에 납부한 보증금 회수가 불투명하다는 것이 골자다.
이에 대해 KT&G 측은 지난해 11월 14일 분기보고서를 통해 상황을 설명한 바 있다. 보고서에 ‘조사의 최종 결과 및 그 영향은 당분 기말 현재 예측할 수 없다’고 명기했다. 하지만 최근 FDA와 주고받은 문서가 공개되자 KT&G는 “2025년부터 전액 반환 예상”이라는 말만 되풀이하고 있다. 불과 몇 개월 만에 설명이 180도 바뀐 셈이다.
1.5조 원이라는 천문학적 금액이 초래할 잠재적 피해도 문제지만, 가장 큰 해외시장 중의 하나인 미국에서의 향후 사업과 관련해서도 악영향이 불가피한 상황인데도 KT&G에선 책임자를 규명하기는커녕 투자자를 위한 설명조차 제대로 하지 않고 있다는 비판이 나온다. KT&G의 불투명한 경영 관행에 대해 기업지배구조 전문가들은 감시와 견제 기능이 사라진 ‘주인 없는 회사’의 구조적인 문제라고 지적한다.
경영진의 이 같은 행위를 견제해야 할 사외이사는 사측이 제공하는 ‘패키지 해외 출장’의 달콤한 유혹에 흠뻑 빠졌다. 일각에선 포스코의 호화 해외 출장보다 강도가 더 하다는 얘기까지 나올 정도다. KT&G 내부 제보를 종합하면 사외이사들은 가고 싶은 여행지를 여행사 패키지 상품으로 고르고, 사외이사를 관리하는 팀이 알아서 가짜 출장 보고서를 만들었다고 한다. KT&G 관계자는 “서류상으로는 드러나지 않겠지만 경영진의 묵인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라고 말했다.
사외이사의 견제 기능이 사라지면서 KT&G 임직원들 사이에서도 ‘도덕적 해이’ 현상이 만연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중 하나가 ‘사택 재테크’다. KT&G 관계자의 제보에 따르면 “전국에 KT&G 임직원들의 사택이 엄청 많은데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아 사택 거주 시한이 지났는데도 회수되지 않은 것들이 상당수”라고 한다. 사택에 거주하면서 본인 소유의 자택에 대해선 월세를 받는 일까지 있지만, 실태가 어느 정도인지 파악조차 돼 있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KT&G는 현재 백복인 사장을 이을 차기 사장 선임 절차를 진행 중이다. 다음 달 초에 숏리스트가 공개될 예정이다. 사외이사로 구성된 지배구조위원회가 전권을 갖고 있다. 현 KT&G 사외이사의 면면을 보면 이들이 KT&G의 경영 혁신을 단행할 후보를 추천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고용인 10인 미만의 광고대행사, 엔터테인먼트 대표가 기업인 사외이사로 포함돼 있을 정도다. KT&G 측은 “다양한 경험을 갖고 있는 기업인의 자문을 받기 위해서”라고 하지만, 광고가 극히 제한돼 있고, 국내 독점 사업자인 KT&G 경영진이 광고 전문가에게 도움을 받을 일이 얼마나 되겠나.
국방부 유관 단체인 국방수송협회의 전 회장이 사외이사로 재직 중인 것에 대해서도 뒷말이 무성하다. KT&G는 군부대와의 ‘은밀한 관계’로 불공정 거래 논란에 휘말린 상태다. 지배구조위원회의 위원장을 맡고 있는 백종수 사외이사는 현직 서울시 규제개혁위원회 위원이다. KT&G 내부자의 증언대로 위원장 역시 해외 패키지 출장 여행에 동행했다면 도덕성 논란에서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KT&G와 포스코를 동일선상에서 비교하는 것은 난센스에 가깝다. 포스코의 사외이사진은 호화 해외 출장에 대해 비판받고 있긴 하지만, 면면의 전문성을 감안하면 차기 회장을 선출할 권한이 아예 없다고 할 수 없다. 이에 비해 KT&G는 사외이사의 비전문성 문제와 함께 임직원이 남몰래 회사 주인 행세를 한 기업이다. 민영화의 취지를 퇴색시켰다는 비난에서 자유롭기 힘들다. 늦더라도 KT&G는 사외이사를 재선정해 사장 선임 절차를 새로 시작하는 것이 옳다.
박동휘 기자 donghuip@hankyung.com
한편, 위의 지적에 대해 KT&G 측은 아래와 같이 해명 및 반론을 요청했다.
군부대 ‘강매’ 주장 관련해 “매년 군PX의 판매량 하위 30%의 제품이 탈락되고 있으며, 연 1회 국군복지단 입찰을 통해 맛과 품질 등 다양한 평가요소를 바탕으로 공정한 군 심의(각군 흡연장병 : 장교,부사관,병사,군무원으로 구성)를 거쳐 신규 입점 제품이 선정되고 있어 강매라는 주장은 사실과 다르다”고 말했다.
고속도로 휴게소의 KT&G 제품 판매에 대해선 “담배를 포함하여 고속도로 휴게소 편의점에서 취급하는 제품은 유통사나 편의점에서 자체적으로 정하고 있는 것인 바, 이에 대해서 회사가 관여할 수 있는 구조가 아니다”고 반박했다.
이와 함께 사택 재테크와 관련해 “대부분 임차계약 형태로 운영되고 있어 거주시한이 종료되면 계약에 따라 퇴거하고 있다”고 해명했다. 사외이사 출장 관련해선 “언론 보도에 언급된 일부 사례는 지난 2012년, 2014년 사안으로 현직 사외이사와는 무관하다”고 밝혔다.
이사진 전문성, 광고 전문가 이사 필요성 관련해서도 입장을 내놨다. “회사의 사외이사는 기업의 대표 및 임원 경력을 보유한 경영전문가 4명, 법률 전문가 1명, 회계 전문가 1명으로 글로벌, ESG 등 기업 경영에 필요한 다양한 분야에서 충분한 실무경험과 전문성을 보유한 6명으로 구성되어 있다”며 “담배사업은 관계 법령에서 정한 엄격한 방식에 따라 광고를 집행해야하는 고도의 전문성을 필요로 하고 있다”고 해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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