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9월 US오픈 테니스대회 여자 단식 결승이 끝난 뒤 라커룸에서 작은 소동이 있었다. 코코 고프(20·미국·세계랭킹 4위)에게 1-2로 역전패한 아리나 사발렌카(26·벨라루스·2위)가 자신의 라켓을 바닥에 내려쳐 망가뜨린 뒤 쓰레기통에 버린 것이다. 이 장면은 TV중계에는 나오지 않았지만 소셜미디어를 통해 공개됐고 사발렌카의 강한 승부욕은 테니스 팬들 사이에서 큰 화제가 됐다.
그랬던 사발렌카가 이번엔 우승 트로피를 품에 안고 흥겹게 춤을 췄다. 올해 첫 메이저대회인 호주오픈 여자 단식에서 우승하며 대회 2연패에 성공했기 때문이다.
사발렌카는 27일(현지시간) 호주 멜버른파크에서 열린 대회 여자 단식 결승전에서 정친원(22·중국·15위)을 2-0으로 완파하며 정상에 올랐다. 대회 2연패를 확정 짓기까지 걸린 시간은 불과 1시간16분이었다.
이날 경기 내내 사발렌카는 정친원을 압도했다. 사발렌카는 1세트를 시작하자마자 상대의 서브게임을 브레이크하며 내리 3게임을 따냈다. 1세트를 6-3으로 가볍게 따낸 그는 2세트에서도 경기를 주도했다. 경기 중 더블폴트는 단 한 개도 기록하지 않았고 상대에게 브레이크를 허용하지도 않았다.
압도적인 경기력 차이에 정친원은 흔들렸다. 2세트 첫 서브게임에서 더블폴트를 3개나 쏟아냈다. 경기장을 가득 메운 중국팬의 요란한 응원도 분위기를 뒤집지 못했다. 이날 정친원은 더블폴트를 6개나 범했고 첫 서브 성공률은 53%에 그쳤다.
7경기 중 단 한 세트도 내주지 않은 무결점 우승. 4강에서는 고프를 2-0으로 꺾으며 지난해 US오픈의 역전패도 설욕했다. 사발렌카는 우승한 뒤 “4년 전 돌아가신 아버지가 아니었다면 오늘의 내가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아버지 세르게이는 6살이던 사발렌카에게 테니스 라켓을 선물하며 그를 선수의 길로 이끌었다. 아이스하키 선수 출신인 그는 딸의 메이저대회 우승과 세계랭킹 1위 등극을 간절하게 바랐다고 한다.
세르게이는 2019년 40대 초반의 젊은 나이에 갑자기 숨졌다. 당시 세계랭킹 12위였던 사발렌카는 아버지의 영전에 “25살이 되기 전 메이저대회 2승을 하겠다”고 약속했다고 한다.
지난해 호주오픈에서 메이저대회 첫 승을 거두며 약속의 절반을 지킨 그는 이번 대회 우승으로 나머지 절반도 완성했다. 1998년 5월 5일생인 그에게 이번 대회는 25세에 치르는 마지막 메이저대회였다.
사발렌카는 앞으로 계속 메이저대회에서 우승하고 싶다는 강한 의지를 드러냈다. 그는 “사실 예전에는 메이저 우승 경험이 있는 선수가 또 메이저 우승컵을 따낸 뒤 우는 모습을 보며 이해가 되지 않았다”며 “하지만 오늘 내가 두 번째 우승을 해보니 그 선수들의 마음이 이해된다”고 말했다. “여전히 우승을 간절히 원하고 그것을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하는 점은 똑같고 주위의 기대가 높아 부담감이 크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이어 “메이저대회에서 한 번 우승하고 사라지는 선수는 되고 싶지 않다”며 “앞으로 더 많은 메이저에서 우승하는 것이 중요한 과제”라고 말했다.
사발렌카의 팔에는 호랑이가 포효하는 모습이 문신으로 새겨져 있다. 호랑이처럼 폭발적인 파워는 그의 강점이지만 심한 기복은 치명적인 단점으로 꼽힌다. 경기 중 위기를 맞았을 때 더블폴트를 쏟아내며 자멸한 적도 적지 않다. 하지만 이번 대회에서는 이 같은 기복도 상당 부분 극복한 모습을 보였다. 4강에서 고프와 만나 여유 있게 앞서가다 3게임을 내리 내주고 타이브레이크까지 가는 위기를 맞았다. 그래도 타이브레이크를 7-2로 승리하고 결승 티켓을 거머쥐었다.
그는 지난해 US오픈 직후 라켓을 부순 일을 언급하며 “그때 나는 정말 우울했고 미쳐있었다”고 털어놨다. 그러면서 “힘든 패배 없이는 큰 우승을 할 수 없다”며 “이제는 내 서브에서 득점을 못 하거나 누군가 내 서브게임을 브레이크하더라도 미쳐 버리지 않는다. 무슨 일이 일어나든 싸울 수 있다는 믿음이 있다”고 힘줘 말했다.
조수영 기자 delinews@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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