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증시에 입성한 바이오기업 DS단석은 상속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한동안 백기사를 찾아 헤매야 했다. 2021년 이 회사 최대주주인 한구재 전 회장이 동생인 한승욱 회장에게 DS단석 지분 100%와 경영권을 넘기기로 한 게 실마리가 됐다. 상속세 부담에 지분 매각이 순조롭게 진행되지 않자 결국 사모펀드(PEF)인 스톤브릿지캐피탈과 손을 잡았다.
한 회장 일가는 스톤브릿지캐피탈에 회사 지분 61%를 매각해 상속세 재원을 마련했다. 스톤브릿지캐피탈은 인수한 지분 대부분을 의결권 없는 우선주로 전환해 한 회장 일가 경영권을 뒷받침했다. 이 같은 전환 과정에서 한 회장 일가는 의결권(보통주) 기준으로 지분 65.7%를 확보하면서 경영권을 다졌다.
잘 만나면 상속세·경영권 고민 해결
DS단석은 그나마 백기사를 활용해 성공한 사례다. 상속세 부담 때문에 수십 년 업력의 장수기업을 제대로 된 경영권 프리미엄도 챙기지 못한 채 PEF 등에 넘기는 사례가 적지 않다. 최근엔 대기업까지 상속세 쇼크를 해결하고 경영권을 지키기 위해 백기사를 찾고 있다. 한미약품과 OCI홀딩스는 서로의 백기사를 자처하면서 상속세 고민을 털어낸 경우다. 송영숙 한미약품그룹 회장 등 한미약품 대주주들은 2020년 임성기 창업주가 별세하자 상속세 5400억원을 부과받았다. 이우현 OCI홀딩스 회장도 2017년 부친인 이수영 회장이 별세하자 상속세 1900억원을 내야 했다. 임성기 창업주 유족은 최근 한미약품 지주사인 한미사이언스 지분 27.03%를 OCI홀딩스에 7703억원을 받고 매각했다. 송 회장 등은 매각 자금 상당액을 상속세 재원으로 활용할 계획이다. 여기에 OCI홀딩스가 백기사로서 유족의 경영권 방어를 지원하기로 했다. 이들은 매각 대금 일부를 활용해 OCI홀딩스 지분을 10.4% 인수했다. 송 회장 등도 개인 지분율이 6.6%에 그치는 이우현 OCI홀딩스 회장의 백기사로 나선다.
조원태 한진그룹 회장 등은 행동주의 투자자인 KCGI가 그룹 지주회사인 한진칼 지분을 늘려가면서 경영권을 압박하자 미국 델타항공 등을 백기사로 끌어들였다. 김정주 넥슨 창업자의 유족도 백기사를 활용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이들은 6조원에 달하는 상속세를 내기 위해 넥슨 지주회사인 NXC 지분 29.3%를 정부에 물납했다. 정부의 NXC 지분은 향후 유족의 경영권을 위협할 수 있는 만큼 백기사를 활용할 가능성이 높다는 분석이다. 최윤범 고려아연 회장도 상속·경영 분쟁 등에 대응해 선제적으로 백기사 확보에 나섰다.
석유화학업체 대한유화공업은 30년 동안의 경영권 위기를 백기사로 해결한 바 있다. PEF인 H&Q코리아가 2007년 정부로부터 대한유화 지분을 사들여 대주주 경영권 방어를 도왔다.
백기사가 흑기사 될 수도
일각에서는 백기사를 통해 상속세 관련 부담을 당장 덜어낼 수 있겠지만 결국 기업의 재무적 부담으로 이어질 것이란 우려의 목소리가 적지 않다. 한 사모펀드 대표는 “백기사는 선의의 행동이 아니어서 언제든 독이 든 성배가 될 수 있다”며 “나중에 자금 회수에 차질이 빚어지면 적대적 관계로 돌변하거나 기업의 성장성을 훼손하는 상황으로 이어지기도 한다”고 말했다.
교보생명도 비슷한 사례로 꼽힌다. 2012년 9월 사모펀드 ‘어피니티컨소시엄(어피니티 PE, IMM PE,베어링 PE, 싱가포르투자청)’은 대우인터내셔널(현 포스코인터내셔널)이 보유하고 있던 교보생명 지분 24%를 인수해 교보생명 주요 주주가 됐다. 그런데 교보생명 IPO 지연 등으로 투자금 회수가 어려워진 어피니티컨소시엄은 신창재 교보생명 회장에게 매입가의 2배 달하는 가격에 풋옵션을 행사해 갈등을 빚었고, 지금까지 법적 공방을 벌이고 있다.
김익환 기자 lovepe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