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는 01월 31일 16:36 마켓인사이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올해 1월 회사채 순발행액(발행액에서 상환액을 제외한 금액)이 역대 최대치를 기록한 것으로 나타났다. 연기금 등 ‘큰손’ 기관들이 자금을 집행하는 ‘연초 효과’에 4월 총선 이후 채권시장 불확실성이 다시 커질 수 있다는 우려가 겹치면서 기업들이 공격적으로 현금을 끌어모으고 있다는 분석이다.
31일 금융투자협회에 따르면 올해 1월 회사채 발행액과 상환액은 각각 14조7152억원, 7조6103억원으로 집계됐다. 발행액에서 상환액을 뺀 순발행액은 7조1049억원에 달한다. 2023년 2월(5조5970억원), 2019년 1월(5조684억원) 등을 뛰어넘는 역대 최고 수준이다.
통상 기관들의 자금 집행이 재개되는 연초는 풍부한 유동성을 바탕으로 회사채 투자수요가 많이 늘어나는 시기다. 다만 올해는 예년처럼 ‘연초 효과’가 발생하기 어렵다는 우려가 컸다. 태영건설 워크아웃이라는 초대형 변수가 터지면서 회사채 투자심리가 위축된 탓이다. 하지만 태영건설 워크아웃 작업이 예상보다 빠르게 개시된 데다 금리 인하 기대감까지 커지면서 회사채 수급 환경이 개선되고 있다는 분석이다.
총선 후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 리스크가 다시 불거질 수 있다는 우려에 선제 조달에 나서는 기업들이 늘어난 것도 순발행액이 급증한 배경이다. 4월 총선이 마무리된 이후 부동산 PF 사업장에 대한 ‘옥석 가리기’가 본격화할 수 있다는 전망에 힘이 실려서다. 구조조정에 속도를 높이는 과정에서 중소형 건설·증권·캐피탈사 등이 연쇄적으로 무너지는 등 다시 채권시장이 흔들릴 수 있다는 우려가 선반영된 것으로 풀이된다.
AA급 주도 속 BBB급도 훈풍
연초 신용등급 AA급 우량채부터 BBB급 비우량채까지 신용도에 상관없이 수요예측 ‘완판’ 행진이 이어지고 있다. 발행 일정이 촘촘하게 몰리면서 이례적으로 기업 4~5곳이 같은 날 회사채 수요예측을 여는 사례도 반복되고 있는 분위기다.31일 투자은행(IB) 업계에 따르면 이날까지 공모 회사채 수요예측을 진행한 기업은 총 53곳으로 집계됐다. 이 가운데 한화솔루션과 CJ ENM이 일부 미매각된 것을 제외하곤 모두 ‘완판’에 성공했다. 미매각된 회사채 물량들도 추가 청약을 통해 무난하게 투자 수요를 확보한 것으로 확인됐다.
대규모 발행에 나선 AA급 우량채들이 시장 분위기를 주도하고 있다. 1월에 발행된 공모 회사채 가운데 KB증권이 8000억원으로 가장 큰 규모의 자금을 조달했다. 현대제철(5000억원), LG유플러스(5000억원), CJ제일제당(4000억원) 등도 자금 확보에 나섰다.
상대적으로 신용도가 낮은 비우량채 BBB급 회사채 시장도 ‘훈풍’이 불고 있다. 고금리를 노린 개인투자자 등 리테일 시장에서 BBB급 회사채에 대한 선호도가 높기 때문이다. 올해 들어 회사채 수요예측을 연 BBB급 기업인 SLL중앙(BBB), AJ네트웍스(BBB+), 두산퓨얼셀(BBB)은 모두 목표 물량을 넘는 매수 주문을 확보했다. 금리 부담도 크게 낮췄다. 흥행에 성공하면서 두산퓨얼셀은 이 회사 개별 민평금리 대비 최대 150bp(bp=0.01%포인트) 낮은 수준에서 목표 물량을 채웠다.
회사채 시장을 찾는 기업들이 늘어나면서 기관 수요 확보 경쟁도 치열해지고 있다. 같은 날 회사채 수요예측을 진행하는 기업들이 대거 몰리는 경우도 속출하고 있는 모양새다. 호텔롯데, HD현대중공업, SK지오센트릭, 현대건설, 팜한농 등 다섯 곳이 22일에, 현대트랜시스, CJ ENM, E1, SLL중앙 등 네 곳이 23일에, KB증권, GS에너지, 코리아에너지터미널, SK에코플랜트 등 네 곳이 24일에 수요예측을 열기도 했다.
다만 건설 리스크가 엮인 기업들은 여전히 자금조달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금융투자협회에 따르면 1월 기타금융채(카드·캐피탈채) 순발행액은 7235억원에 그쳤다. 특히 부동산 PF 위험 노출도가 높다고 평가되는 캐피털채에 대한 투자수요가 부진한 것으로 관측된다.
투자심리 살아나자 선제적 자금 조달
회사채 수급 환경이 개선된 게 순발행액 급증으로 이어진 것으로 풀이된다. 연내 기준금리 인하 기대감이 커지면서 회사채 투자심리가 살아나고 있기 때문이다. 기관이 지갑을 푸는 ‘연초 효과’로 풍부한 유동성도 더해졌다.불안감이 커진 기업들이 조달 시기를 연초로 당긴 것도 회사채 순발행액이 많이 늘어난 요인이다. 당장 회사채 만기가 돌아오지 않더라도 연초에 자금을 확보하겠다는 움직임이 분주하다는 게 업계의 설명이다. 자금난이 급한 일부 기업들은 개별 민평금리보다 높은 수준에 금리가 책정되는 ‘오버 발행’을 감수한 채 시장에 나오고 있다. 정혜진 신한투자증권 연구원은 “4월 총선 전후로 부동산 PF 사업장과 건설·금융권의 구조조정 우려가 재차 고조될 수 있다”고 말했다.
2월에도 회사채 시장은 활성화할 전망이다. ‘조(兆) 단위’ 빅딜들이 출격을 대기하고 있다. LG에너지솔루션은 오는 7일 최대 1조6000억원어치 회사채 수요예측을 진행할 예정이다. 회사채 시장 단골손님인 LG화학도 연초 발행 여부를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이미 많은 기관들이 회사채를 담은 만큼 추가로 시장에 등장하는 기업들을 바라보는 시각은 더욱 깐깐해질 것으로 관측된다. 실적이나 신용도 등을 꼼꼼하게 살펴 매수할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다. 실적 부진으로 흔들리는 CJ ENM이 지난 23일 열린 회사채 수요예측에서 일부 미매각된 게 대표적인 사례다. 정윤정 교보증권 연구원은 “개별 기업의 재무 여건, 업황 등을 반영한 투자가 이뤄지면서 옥석 가리가 심화하고 있다”고 말했다.
장현주/김익환 기자 blacksea@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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