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용석 칼럼] '불황의 청산효과' 누리는 美 경제

입력 2024-01-31 17:54   수정 2024-02-01 09:13

미국의 경제 규모는 한국의 15배가 넘는다. 그런 미국이 지난해 한국(1.4%)보다 높은 2.5% 성장률을 기록했다. 미국 중앙은행(Fed)이 물가를 잡기 위해 기준금리를 연 5.5%까지 올렸는데도 경기 침체는커녕 전년(1.9%)보다 더 성장했다. 국제통화기금(IMF)에 따르면 미국의 성장률은 일본(1.9%), 독일(-0.3%), 영국(0.5%), 프랑스(0.8%), 이탈리아(0.7%) 등 다른 선진국을 압도한다. 항공모함이 구축함보다 빨리 달리는 격이다.

인플레이션과의 전쟁도 성과를 내고 있다. 2022년 9%를 넘었던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지난해 12월 3.4%로 내려왔다. 실업률은 3.7%로 완전고용 수준이다. 너무 뜨겁지도 너무 차갑지도 않은 이상적인 경제 상황을 골디락스라고 하는데 지금 미국 경제는 골디락스보다 더 좋다는 말이 나온다.

뉴욕증시도 연초부터 사상 최고 수준으로 올라섰다. 애플, 마이크로소프트, 구글, 아마존, 엔비디아, 메타 등 ‘매그니피센트 7’으로 불리는 빅테크들이 강세장을 이끌고 있다.

미국 경제가 강한 이유는 뭘까. 혁신적인 경제, 방대한 시장, 세계적인 대학 경쟁력, 우수한 인적자본, 풍부한 천연자원, 꾸준한 이민을 통한 노동력 증가 등 이유는 셀 수 없이 많다.

한국에선 거의 주목하지 않지만 중요한 요인이 있다. 바로 고용 유연성이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폴 크루그먼 뉴욕시립대 교수가 지난해 뉴욕타임스 칼럼 ‘미국 경제 성공의 비밀’에서 이 대목을 짚었다. 미국은 해고가 쉬운 나라다. 코로나19 때도 유럽 등과 달리 해고를 막지 않았다. 대신 실업급여를 늘렸다. 그 결과 단기적으로 실업률이 치솟았지만 팬데믹을 거치면서 달라진 시장 환경에 맞는 기업 등으로 인력이 쉽게 이동할 수 있었고 이것이 강력한 경제 회복의 배경이란 게 크루그먼의 설명이다.

한국은행의 한 금융통화위원도 사석에서 “미국엔 불황의 청산효과(cleansing effect of recessions)가 작동한다”며 비슷한 얘기를 했다. 불황 때 한계기업 구조조정이 원활하게 이뤄지면서 그런 기업에 갇혀 있던 인력이 신산업이나 호황 산업으로 이동하고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미국 경제가 더 강해진다는 것이다. 그는 “불황의 청산효과 덕분에 미국 경제는 불황은 짧고 호황은 길다”고 했다.

이런 역동성은 미국이 인공지능(AI), 양자컴퓨터, 생명공학 등 첨단 미래산업을 이끌고 세계 경제를 리드할 수 있는 원동력이다.

미국은 1980년대 후반 일본에 추월당할 뻔했다.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한동안 일본에 역전됐고 반도체, 가전, 자동차 등 주요 산업에서 일본에 주도권을 뺏겼다. 하지만 아날로그 시대에서 디지털 시대로의 전환기에 혁신 성장을 주도하며 일본을 따돌렸고 지금은 1인당 GDP가 일본은 물론 유럽의 두 배가 넘는다. 미국은 중국과의 경제 전쟁에서도 격차를 벌리고 있다. 팬데믹 이후 중국 경제가 주춤한 반면 미국은 고성장을 이어가 미국 대비 중국의 경제 규모가 2021년 76.4%에서 지난해 64%로 낮아졌다.

미국 경제의 역동성은 한국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한국은 빠르게 성장했지만 1인당 GDP가 미국의 42%(2022년 기준)에 그친다. 아직 갈 길이 먼데 벌써 성장동력이 떨어지고 있다. 역동성을 높이기 위한 구조개혁은 더디기만 하다. 물론 당장 미국처럼 자유로운 해고를 도입하는 건 한국 현실에선 어렵다. 그렇더라도 지금보다 고용 유연성을 높일 방법을 찾아야 한다. 주 52시간제 관리 단위를 1주일에서 월·분기·반기·연으로 확대하는 최소한의 개혁조차 힘들어선 저성장의 늪에서 빠져나올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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