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내가 쓴 원고에 따라 무대를 중계방송하듯 유창하게 진행하던 진행자의 설명이 극장에 울려 퍼지는 순간, 끝부분에서 약간의 웅성거림이 들렸다. 휘호인 낙엽귀근(落葉歸根: 낙엽은 떨어져 뿌리로 돌아간다)을 ‘낙엽귀조’로 보고 원고를 작성한 게 화근이었다. 결국 진행자는 당당하게 힘주어 그날의 휘호를 낙엽귀조로 읽었다. 아뿔싸! 그때 서야 상황을 파악한 나는 어쩔 줄 몰랐다. 우선 나 때문에 진행자가 실수한 것으로 오해받게 된 것, 무섭게 생긴 연출가 오대환 선생님으로부터 불호령을 받을 일, 그리고 그 무엇보다 대가 중의 대가인 황 선생님의 공연을 망친 것 같아 좌불안석이었다. 공연이 끝나고 난 죄인처럼 고개를 숙인 채 황 선생님께 잘못을 빌었다. 앞이 캄캄했다. 그런데 황 선생님은 딱 한 말씀만 하셨다. “그럴 수도 있지 뭐. 아무려면 어때?” 황 선생님의 말씀에 더 몸 둘 바를 몰랐다. 역시 차원이 다른 분이었다. 사건 이후 황 선생님은 나를 오히려 더 많이 챙겨주고 정말 친구처럼 대해주셨다.
그러던 어느 날인가, 가나아트센터 실외 무대에 오른 황 선생님은 명주 두루마기를 입고 사뿐히 걸어 나와 연주한 뒤 나비처럼 퇴장했는데, 그 모습이 신선처럼 느껴졌다. 홈페이지 게시판을 통해 팬들과 소통하던 황 선생님이었기에 나도 글 한 줄을 남겼다. “선생님, 정말 신선 같았어요.” 그러자 곧바로 댓글이 달렸다. “그런데 나는 신선 같은 사람이 아니라 신선이라오. 이태백처럼 하늘에서 귀양 온 적선(謫仙). 이태백을 ‘이적선’이라고 하니까, 나는 ‘황적선’인가?”
지난 1월 31일은 선생님이 하늘로 돌아가신 지 6주기가 되는 날이었다. 친구처럼 스스럼없이 대해주신 선생님이 빙긋 웃으며 던지던 농담이 그립다. “유은선의 분위기는 호박죽처럼 참 친근해”라고 칭찬해주던 선생님, “난 항상 깨어 있으니 괜찮다”고 어느 시간에도 이야기를 들어주시던 선생님, “유은선이 섭외하면 1분만 공연해도 괜찮고, 아무 때나 연주 그만하라고 해도 들을 거야”라며 무한 신뢰를 보여준 선생님. 돌아가신 뒤 사모님을 통해 내가 하루빨리 자리를 잡아야 한다고 걱정하셨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고마운 마음에 몇 번이고 하늘을 보았다. 하늘에서도 ‘황적선’의 무한 신뢰가 있었기에 오늘 내가 이 자리에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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