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월 31일. 축구 대표팀 주장 손흥민(32·토트넘)은 호주 시드니 선코프 스타디움에 누워 두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눈물을 흘렸다. 당시 한국은 2015 아시아축구연맹(AFC) 아시안컵 결승 결승에서 호주와 결승전 연장 혈투 끝에 1대 2로 패하며 결국 트로피를 들어 올리지 못했다. 23세 손흥민은 "우린 아직 어린 선수가 배워야 할 게 많다"며 "경험을 쌓아 다음을 잘 준비하겠다"고 다짐했다.
그로부터 9년 후인 3일 한국 대표팀은 같은 대회에서 다시 호주를 만났다. 경기 전반에서 선제골을 내줬지만, 후반 동점골을 넣고 이후 연장 접전 끝에 역전골을 터뜨려 2대1로 승리했다.
이 날 손흥민 선수는 경기 후 인터뷰에서 "2015년 당시 너무나 마음이 아팠다. 좋은 기회를 놓친 것 같아 누구보다 마음이 아팠다. 하지만 그런 경기들과 그런 경험들로 인해서 축구선수로서 성장할 수 있는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이어 "너무나 어려운 경기였다. 경기 퍼포먼스에 100% 만족하지 않지만, 경기 결과를 가져왔다는 게 중요하다"며 "팀으로서 좋은 결과를 내고 준결승에 진출했다. 최종 목표를 이루기 위해 다음 경기도 잘하겠다"고 전했다.
이날 경기는 정규시간 90분까지는 9년 전과 비슷하게 흘러갔다. 당시 결승전에서 한국은 전반 45분 실점해 끌려가다가 후반 46분 손흥민의 극적인 동점골로 승부를 연장으로 넘겼다. 이날 8강전에서도 한국은 전반 막판에 실점했다. 전반 42분 크레이그 구드윈의 발리슛에 당했다. 손흥민이 승부를 연장으로 끌고 가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점도 같았다. 후반 49분 손흥민이 골대 왼쪽으로 돌파하다가 루이스 밀러로부터 페널티킥을 얻어냈다. 황희찬(울버햄프턴)이 깔끔하게 성공시키면서 한국은 패배를 면했다.
과정은 같지만, 결과는 달랐다. 9년 전 한국은 연장 전반에 결승골을 내줬다. 그러나 이날 결승골은 한국의 차지였고, 해결사는 손흥민이었다. 연장 전반 14분 황희찬이 얻어낸 프리킥을 오른발 감아차기 직접 슈팅으로 마무리해 한국에 승리를 안겼다.
9년 전 종료 휘슬이 울리자 분한 나머지 엉엉 울었던 손흥민은 이날은 당당하게 그라운드를 돌며 팬들에게 인사했다. 태극전사들은 '불굴의 정신력'을 보여주고 있다. 조별리그 2차전 요르단과 경기부터 이날 8강전까지 연속으로 4경기에서 후반 추가시간에 득점했다. 특히 사우디아라비아와 16강전, 그리고 이날 8강전에서는 후반 추가시간 동점골로 연장까지 승부를 끌고, 결국 다음 단계로 올라섰다. 열세인 상황에서 절대 지지 않고 승부를 뒤집어버리는 대표팀에 대해 '좀비 축구'라는 별명까지 붙었다.
이에 대해 손흥민은 "팀의 능력이라고 생각한다. (거듭된 극적인 승부가) 선수들의 정신력을 더 단단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고 있다. 이런 경기로 인해 믿음이 더 강해진다"면서 "연장전 가면 대부분이 지치곤 하는데, 우리 선수들은 다 해주고 있다. 하나로 뭉쳐있는 게 가장 큰 장점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어 "축구선수를 하면서, 연장전을 두 경기 연속 뛴 적은 한 번도 없었을 것 같다"면서 "정신력으로 이겨내는 게 대회의 묘미인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나라를 위해 뛰는데 힘들다는 건 핑계일 뿐이다. 이제 4개 팀만 남아 하나의 우승컵을 놓고 싸우게 된다. 어떤 핑계도 필요 없다. 한 가지 목표만 가지고 나아가겠다"고 강조했다.
손흥민은 기자들의 질문이 끝나자 자청해서 한마디를 더 했다. 그는 "늘 경기를 뛰는 선수들이 스포트라이트를 받는다"면서 "오늘만큼은 함께 경기에 나서지 못하고 벤치에서 있던 선수들, 그라운드에 들어가지 못한 선수들에게 관심을 가져주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조아라 한경닷컴 기자 rrang123@hankyung.com
관련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