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에는 ‘덮어놓고 낳다 보면 거지꼴을 못 면한다’로 시작했다. 1960년대의 일이다. 그러다 3명을 3년 터울로 35세 이전에 낳고 끝내자는 ‘333’이란 구호가 등장한다. 처음으로 ‘정상적 가족 모델’이 제시됐다. 그러다 1971년에 ‘딸 아들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며 2명으로 수정된다. 1970년대 말에는 공격적으로 바뀐다. ‘잘 키운 딸 하나 열 아들 안 부럽다’며 목표가 1명으로 줄어든다. 아예 줄이자는 거다. 한국 특유의 ‘빨리빨리’가 작동하니 1983년에는 합계출생률이 2.1명 이하로 떨어진다.
정부의 목표를 5년이나 일찍 달성한 그때 멈춰야 했었다. 나도 그때 홀딱 세뇌돼 하나만 낳는 엄청난 실수를 했다. 그렇게 계속 진도가 나가면 ‘밤에는 손만 잡고 자자’가 나올 수도 있었겠지만 ‘무서운 핵폭발, 더 무서운 인구폭발’이라는 겁박으로 종결된다.
관성의 힘을 받은 출생률은 0명을 향해 질주했다. 매사에 굼뜬 당국은 출생률이 1.57명 된 1996년에 와서야 억제 정책을 폐기한다. 그리고 바로 유턴해서 2000년부터 ‘더 낳자’로 급선회한다. 참으로 부지런도 하다. 상황이 심각해지니까 지금까지 280조원의 예산까지 투입했다는데 출생률은 가던 길을 계속 가고 있다. 드디어 경제 폭망을 넘어 국가 소멸을 운운하며 겁을 준다. 인구가 핵폭탄이라며? 샤워실의 바보가 따로 없다. 그런데 정말 그런 걸까? 출생이라는 게 구호나 예산으로 그렇게 가볍게 움직일 수 있는 걸까?
1968년 존 칼훈이라는 미국의 동물행동학자가 재미있는 실험을 했다. 먹이를 무제한으로 제공하고, 천적이 전혀 없는 환경에서 최대 3800마리의 쥐가 생활할 수 있는 ‘쥐들의 천국’을 만들었다. 그리고 쥐 4쌍을 투입했다. 쥐들에게는 더없이 황홀한 공간에서 개체는 빠르게 증가했다. 첫 300일 동안은 말이다. 그러다 증가 속도가 점점 느려지다가 600일이 지나면서 2200마리를 정점으로 개체수가 줄기 시작했다. 먹이는 여전히 풍부했지만, 힘이 센 녀석들이 먹이가 제공되는 공간을 독점했다. 빈부격차가 생긴 거다. 약한 쥐들은 코너에 몰려 살았고 모두가 공격적으로 바뀌어 갔다. 걸핏하면 다른 쥐를 공격하거나 새끼를 물어 죽이기도 했다. 유리한 위치를 차지한 수컷들도 그런 공격을 경계하느라 짝짓기에 관심을 잃었다. 모두의 스트레스가 극한으로 올라가며 번식을 멀리하고 몸을 치장하는 데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 그들은 윤기가 나는 털을 가지게 됐지만 숫자는 빠르게 줄어들었다. 실험은 1500일까지 진행되다가 종료됐다.
동물의 본성이 그런가 보다. 주변 개체 빈도가 어떤지에 따라 경쟁 강도를 판단한다. 강도가 낮게 느껴지면 번식의 본능을 따르고, 높다고 판단되면 번식보다 생존에 에너지를 집중한다. 인간도 결코 예외일 수는 없다. 복잡한 대도시의 출생률이 낮은 것만 봐도 단박에 알 수 있다.
그러면 한국의 환경은 어떨까? 국토 면적을 인구로 나눈 1인당 국토 면적을 구해보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서 한국이 압도적인 1위다. 일본보다 1.5배, 프랑스보다는 2.3배나 비좁게 산다. 산술적으로 프랑스의 출생률을 실현하려면 그들이 쓰는 예산의 2.3배를 투자해야 한다. 그런데 그렇게 투자해서 환경오염이나 자원 부족 문제가 있는 OECD 1위의 인구밀도를 지속한다? 그게 과연 후손들에게 행복을 물려주는 현명한 판단일까? 아이를 낳고 키우는 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겠지만 주어진 규모에 적정 인구는 얼마인지도 한 번쯤은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 안타깝게 아무도 그런 연구는 안 한다. 욕먹을까 겁이 나서다.
지금, 우리는 중요한 질문을 놓치고 있다. ‘찬물 나온다. 빨리 더운물 틀어라’는 조건반사에서 벗어나 ‘얼마가 적정한가?’와 ‘인구가 줄어드는 정해진 미래에 어떻게 적응하며 경쟁력을 유지할 것인가?’라는 질문 말이다. 돌고 돌아 “덮어놓고 ‘안’ 낳다 보면 거지꼴을 못 면한다”로 바뀌었지만, ‘구조에 대한 고민 없음’은 60년 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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