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욱 "R&D 예산은 '국가 지식 유지비'…혁신·선도 연구에 과감히 투자"

입력 2024-02-04 18:35   수정 2024-02-05 00:48

박상욱 대통령실 과학기술수석은 지난달 25일 임명되자마자 과학기술계 인사들로부터 축하와 기대보다 우려와 성토의 목소리를 먼저 들어야 했다. 정부 연구개발(R&D) 예산 삭감의 여진이 아직 남아 있어서다. 국가 R&D 예산을 어느 분야에, 얼마나 늘릴지가 박 수석의 첫 과제가 됐다. 그는 4일 한국경제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세계를 선도할 혁신적이고 도전적인 연구를 한다면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는 게 정부의 원칙”이라고 말했다. 그는 “과거처럼 될 만한 분야에 선택과 집중을 하자는 게 아니다”며 “세계 과학기술을 한 단계 진보시킬 수 있는 수준의 연구에 뛰어들 수 있는 시스템과 문화를 만드는 게 목표”라고 강조했다.


▷대통령실에 과학기술수석실이 만들어진 건 처음입니다.

“윤석열 대통령은 과학기술에 굉장히 관심이 많습니다. 참모들에게 ‘어려운 사람을 위해서 일한 대통령이 되고 싶고, 또 성공한 과학 대통령이 되고 싶다’고 여러 차례 말했습니다. 대한민국이 다시는 주저앉지 않을 안정적인 선진국, 즉 강대국형 선진국으로 도약하기 위해서는 과학기술이 발전한 나라로 거듭나야 한다는 절박함도 있습니다.”

▷대한민국의 수준은 어느 정도입니까.

“대한민국은 제조업 ‘슈퍼파워’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과학기술과 관련한 새로운 이론을 내놓거나 획기적인 개발에 성공해 인류에 공헌한 것은 아직 딱히 없습니다. 우리가 진정한 과학기술 강대국 반열에 오르려면 퀀텀 점프를 해야 합니다.”


▷그런데 지난해 정부는 R&D 예산을 줄였습니다.

“R&D 예산은 연구를 제대로 수행할 수 있는 사람만 있다면 클수록 좋습니다. 하지만 예산이 갑자기 늘어나 국민의 혈세가 정부가 제대로 관리할 수 없는 분야로 흘러간다면 문제입니다. 지난 정부는 ‘소부장’(소재·부품·장비) 분야에서 공급망 문제가 발생하자 해당 분야 R&D 예산을 급격하게 늘렸고, 그 결과 거품이 생겼습니다. (예산 삭감은) 거품을 걷어내는 과정이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기초연구 분야 예산은 거의 줄지 않았습니다.”

▷앞으로 예산을 대폭 늘릴 계획입니까.

“R&D 예산은 단순히 특정 연구개발을 위한 비용의 총합이 아닙니다. 한국 과학기술계가 유지되는 데 필요한 비용이자, 한국 과학기술 지식의 유지비입니다. R&D 예산의 증감에 따라 한국 과학기술 지식 총량이 좌우되는 동시에 과학기술 지식이 늘어나는 속도에 따라 R&D 예산 규모가 결정되기도 합니다. 예산을 함부로 늘려서도, 줄여서도 안 되는 이유입니다.”

▷조금 더 설명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양자 분야를 육성하자며 무턱대고 많은 예산을 배정해봐야 관련 연구를 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춘 인물이 그만큼 없습니다. 단순히 예산을 늘리는 게 능사가 아니라 한국 양자 분야의 역량, 특히 인재를 키워나가는 작업이 동시에 이뤄져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양자 기술에 대한 투자가 미국, 중국에 비해 턱없이 부족하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한국은 항상 미국과 중국만 봅니다. 하지만 독일 프랑스 영국 일본 등과 비교할 때 한국이 양자 기술에 대해 손을 놓아야 할 정도인가 생각하면 그렇지 않다고 봅니다. 한국은 제조업 역량이 막강합니다. 반도체 기술도 발달했습니다. 언젠간 양자 컴퓨팅에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열심히 노력하면 세계 3위권도 노려볼 수 있습니다. 특히 미국과의 과학기술 동맹으로 같이 발전할 수 있습니다. 다만 인력부터 양성해야 하기 때문에 지금의 투자 규모가 아주 크지도 않지만 작지도 않다고 생각합니다.”

▷취임 일성으로 선도국에 걸맞은 국가 R&D 시스템을 얘기했습니다.

“윤 대통령은 우리나라가 다른 나라를 선도할 수 있는 연구, 새로운 것에 도전하는 연구에는 얼마든지 지원하겠다는 생각입니다. 과거 ‘선택과 집중’과는 다릅니다. 선택과 집중은 선진국을 추격하기 위해 성공 가능성이 높은 분야에 예산을 우선 투입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앞으로는 실패 확률이 높더라도 도전적이고 혁신적인 연구를 대폭 지원하겠다는 것입니다.”

▷선진국들의 R&D 예산은 어떤가요.

“대부분 국가들은 선진국이 되면 R&D 예산 증가세가 둔화합니다. 예외는 미국입니다. 과학기술 분야에서 새로운 것을 계속 내놓는 미국은 R&D 예산 증가율이 경제성장률 등과 비교해 더 빠르게 늘고, 새로운 것을 내놓지 못하는 쇠락한 선진국은 예산 증가율이 줄어듭니다. 우리는 갈림길에 서 있습니다. 미국처럼 새로운 기술 연구가 이어져 R&D 예산 증가율이 늘어나도록 해야 합니다.”

▷이공계 인재 부족이 심각합니다.

“위기 상황입니다. 이공계 인재 양성은 R&D 수행을 통해 이뤄집니다. 대학원에서 석·박사 과정을 통해 연구원을 양성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공계 대학원에 진학하겠다는 인재가 갈수록 줄고 있습니다. 다른 직업과 비교해 이공계 연구원의 보상이 과거만큼 크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육부, 과학기술정보통신부와 함께 이공계 대학원에 대한 지원을 대폭 강화하는 방안을 마련 중입니다. 구체적인 대책은 2월에 발표합니다.”

▷한국 과학기술계는 노벨상을 하나도 타지 못했다는 자조적인 평가도 있습니다.

“노벨상은 언젠가 나올 것이고, 그 시기는 다가오고 있습니다. 한국 영화·K팝이 아카데미상, 그래미상을 받을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잖습니까. 다만 노벨상이 없다고 콤플렉스를 느낄 필요는 없습니다. 노벨상 10개 받은 나라보다 세계를 휩쓰는 갤럭시 스마트폰을 만드는 나라가 더 훌륭한 나라가 아니겠습니까.”

▷우주도 최근 우리가 새롭게 도전하는 분야입니다. 어떻게 키워갈 생각입니까.

“우주는 선진국에 비해 많이 뒤처진 게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뛰어들어야 하는 이유는 우주 활용 산업 규모가 너무 크기 때문입니다. 위성위치확인시스템(GPS)을 활용한 영상 정보 산업, 통신 산업 등이 대표적입니다. 위성체 개발 및 제조도 우리가 충분히 노릴 수 있는 분야입니다.”

▷인공지능(AI) 분야에서 한국은 얼마나 경쟁력을 갖추고 있습니까.

“한국은 이미 세계 5위권 AI 강국인데, 3대 강국으로 뛰어오를 수 있습니다. 미국을 제외하면 한국처럼 네이버, 카카오 수준의 빅테크를 보유한 나라는 없습니다. 자국산 검색엔진이 시장을 장악한 나라도 거의 없습니다. 우리에겐 반도체 기술력도 있습니다. 충분히 실현 가능한 목표입니다.”

▷AI가 다른 산업을 발전시킬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옵니다.

“바이오산업을 주목해야 합니다. 한국은 바이오산업에서 추격 국가입니다. 바이오 제조는 세계적인 수준이지만 신약 개발 분야는 뒤처집니다. 이를 만회할 계기가 AI입니다. AI를 활용하면 신약 개발 능력을 획기적으로 높일 수 있고, 개발 기간은 대폭 줄일 수 있습니다. 신약 후보 물질을 찾거나 특정 물질의 새로운 효용을 찾는 데 AI를 활용할 수 있습니다. 두 분야의 접목을 과학기술수석실의 역점 과제 중 하나로 보고 있습니다.”

▷어떤 과학기술수석이 되고 싶습니까.

“저는 연구 현장을 잘 압니다. 과학기술수석실을 연구 현장과 밀접하게 하는 게 첫 번째 목표입니다. 전통적 관료 조직이 아니라 민간 조직처럼 일하겠다는 의미입니다. 과학기술수석은 국가의 최고기술책임자(CTO)가 될 것입니다.”
"프로젝트 업무 맡듯이 AI·바이오 비서관 둔다"
과기수석실은 매트릭스 조직
대통령실 과학기술수석실은 산하에 4명의 비서관을 두기로 했다. R&D혁신비서관, AI디지털비서관, 첨단바이오비서관, 기술전략비서관 등이다.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 각 비서관실은 특정 부처를 전담해 맡지 않고, 프로젝트를 중심으로 움직인다.

박상욱 과학기술수석은 “모든 비서관이 굉장히 다부처적이고 범정부적인 일을 맡게 된다”며 “예를 들어 국가 AI(인공지능) 비전과 전략을 수립하고 민간이 잘할 수 있도록 장애물을 치우는 역할을 하게 될 AI디지털비서관은 행정안전부, 산업통상자원부, 과학기술정보통신부 등과 협업하게 된다”고 설명했다.

행정관도 여러 부처에서 파견받을 계획이다. 박 수석은 “행정관들에게 친정 부처와 대통령실의 가교 역할을 하겠다는 생각이면 오지 말라고 통보했다”며 “단순히 대통령실의 주문을 부처에 전달하는 역할 외에 완전히 새로운 역할을 맡길 계획”이라고 강조했다.

비서관 인선은 조속히 마무리하겠다는 목표다. R&D혁신비서관은 그동안 경제수석실 산하에서 과학기술비서관을 맡았던 최원호 비서관이 담당한다. 부처 간 조율이 중요한 자리여서 관료 출신이 맡는다는 설명이다. 나머지 3명은 모두 민간에서 충원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있다. 박 수석은 “전통적인 관료 조직을 절대 만들지 않을 것”이라며 “미션과 테마 중심의 매트릭스 조직으로 수석실을 꾸려갈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수석실 사무실부터 스타트업 같은 ‘오픈 플랜’으로 설계했다”고 말했다.

■ 박상욱 수석은…

△1972년 서울 출생 △1995년서울대 화학과 졸업 △2004년 서울대 대학원 화학과 석·박사 △2010년 영국 서섹스대 대학원 과학정책학 박사 △2012~2017년 숭실대 행정학부 교수 △2016~2017년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 전문위원 △2018~2020년 서울대 자연과학대학 지구환경과학부 교수 △2021년~ 서울대 자연과학대학 과학학과 교수 겸 과학기술과미래연구센터장 △2024년~ 대통령비서실 과학기술수석

정리=도병욱/양길성/이해성 기자 dodo@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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