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체 여기저기에 정체를 알 수 없는 고철덩이를 매단 은색 스포츠카가 마치 마법에 걸린 듯 가볍게 공중에 떠오른다. 이어 수백 명의 머리 위로 다가온 자동차는 제자리에서 위아래 방향으로 360도를 빙빙 도는 진기한 묘기를 선보이더니 더는 지체할 시간이 없다는 듯 돌연 방향을 틀고선 시야에서 사라진다. 화려한 영상 편집 기술로 만들어낸 ‘허구’가 아니다. 시간 여행을 소재로 1980년대 선풍적인 인기를 끈 동명의 공상과학(SF) 영화 ‘백 투 더 퓨처’를 각색한 뮤지컬에서 실제로 구현된 장면이다.
거대한 스크린을 그대로 뚫고 나온 듯한 타임머신 자동차 ‘드로리안’의 생동감 넘치는 움직임에 두 눈이 동그래진 관객들은 참을 수 없다는 듯 연신 환호성을 내질렀고, 그렇게 시작된 박수 세례는 자동차가 무대 뒤편으로 자취를 감춘 뒤에도 멈출 줄을 몰랐다. “자동차 하나만으로도 티켓값을 낼 가치가 있다”는 뉴욕타임스의 평은 과언이 아니었다. 원작을 이미 본 중장년층에겐 짙은 향수를 불러일으키고, 원작을 아직 보지 못한 청년층에겐 상상력을 자극할 만한 공연이라는 얘기다.
2022년 영국 공연계 아카데미상으로 불리는 ‘올리비에 어워즈’에서 최우수 신작 뮤지컬 작품상을 거머쥔 데 이어 지난해 진출한 미국 브로드웨이에서도 흥행에 성공하면서 작품성과 대중성을 모두 인정받은 화제작이라서다. CJ ENM이 공동 프로듀서로 참여한 이 뮤지컬은 오는 6월 북미 투어가 예정돼 있다. 지금으로서는 ‘세계 뮤지컬의 메카’로 불리는 미국 뉴욕 브로드웨이와 영국 런던 웨스트엔드에서만 볼 수 있는 귀한 작품인 만큼, 두 나라를 방문한다면 꼭 봐야 할 공연으로 손꼽힌다.
뮤지컬에선 브라운 박사의 목숨을 위협하는 게 리비아인들의 총격이 아니라 방사능 중독으로 설정이 바뀌긴 했지만 대부분 장면에서는 대사 한 문장, 캐릭터의 독특한 숨소리 하나하나까지 똑같이 구현해낸다. 빠른 전개와 질서정연한 플롯, 자연스러운 장면 전환은 관객을 무대에서 한시도 눈을 떼지 못하게 한다.
뮤지컬 넘버(노래)로 쓰인 주제가 ‘사랑의 힘(Power of Love)’을 비롯한 오리지널 사운드 트랙과 17개 신곡은 특유의 쾌활한 에너지로 연신 귀를 사로잡는다. 원작의 음악을 작곡한 앨런 실베스트리와 여섯 번의 그래미상을 거머쥔 팝 음악 작곡가 글렌 발라드가 합심한 결과다.
“(뮤지컬로의 각색 과정에서) 우리는 새로운 작품을 만들고 싶지 않았습니다. 단지 원작을 조금 더 매끄럽게 만들고 싶었습니다.” ‘백 투 더 퓨처’ 극작가 게일이 남긴 말이다. 그의 말처럼 원작의 정신은 그대로 이어졌으나 작품이 전하는 에너지와 감정, 시·공간적 경험은 분명 다른 것이었다. 배우의 숨소리까지 느껴지는 살아 있는 연기부터 온몸을 감싸는 폭발적인 음향과 섬광이 난무하는 화려한 무대 효과, 눈앞에서 날아다니는 타임머신 자동차까지. 시대의 고전으로 사랑받는 영화 ‘백 투 더 퓨처’가 수많은 속편, 리메이크 제작 제안을 모두 거절하고 ‘뮤지컬로의 귀환’을 선택한 이유를 납득할 만한 무대였다.
런던=김수현 기자 ksoohyu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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